矯角殺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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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는 지루한 하루가 시작됩니다.
시시한 낯짝의 상관에게서 내려오는 반복되는 명령, 훈련, 업무...
평소와 같지만, 그 기준에서 조금 눈을 돌리면 분명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자그마치 1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거슬러올라가면...
일상의 의미가 뒤집히던 그 날.
그 사건 이후로 당신의 주위에서 사라진 많은 것들 중 하나,
루이.
어째선지 그 인물이 지금 당신의 앞에 서있습니다.
Louis:안녕, 나이젤.
갑작스럽지만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면서
입가에 부드러운 호를 그린 입이 잔잔한 음색을 전합니다.
마치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처럼
퇴색된 일상에 지워져버렸던 얼굴로요.
Louis:어때? 같이 가줄래?
Nigel:... 간단한 이야기면 여기서 하고 끝내지.
Louis:그럴 수 있었다면 나도 이렇게 불러 세우지 않았을걸?
Nigel:...
Louis:고마워.
그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건물 내에 있는 작은 인조 화원.
바람 하나 일지 않는 이곳에서 정체된 꽃향기가 풍겨옵니다.
훤히 트인 시야에는 색색의 여러 꽃들이 들어오는데
I는 그 중에 노란 튤립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입을 엽니다.
Louis:옛날에 네 방에도 이게 있었는데.
Nigel:... (그 이후로 눈길조차 들르지 않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화원 따위에 관심을 둔 건 아니었어서.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던지 간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다. 홀린 듯 바라보다 물음에 너를 본다.) ... 무슨 대화가 하고 싶어서 여기로 불러낸거야, I.
Louis:이유가 조금 다르네. 하고 싶은 말을 정해놓고 온 건 아니야. (벌어졌던 당신과의 거리를 좁힌다. 느긋한 움직임이 여유를 보인다. 시간의 공백을 은 그에게 뜻깊은 깨달음을 선사해 주지는 않았다. 그 반증은 곧···) 모르겠어? 왜 이런 곳으로 불렀는지.
Nigel:꽃 구경이라도 하자고 불러낸거야? (물러설 이유가 마땅치 않았다. 물음에 답한 말이 정답이 아님을 알고 읊조렸다. 답이 맞다면야,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
Louis:(약하게 세어 나온 숨소리에 옅은 웃음을 물들였다. 휙 돌아간 몸은 꽃의 덤불 사이를 꿰뚫는 길로 유유히 흘러들어갔다) 스스로 영면을 하려고 했던 사람답지가 않아서. 진실을 찾던 네가 보이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는 짓만 골라 하는 너라서. 그런 것들이 이유야. (곧 함께한 그의 목소리에는 한 점 떨림도 없었다. 그저 거짓 없는 진심을 온전히 당신에게) 그 모든 게 거슬려서. 네 모든 행동이 불쾌해서. 너는 알까? 내가 얼마나 너를 역겨워하는지.
Nigel:(조작된 영상 속 한 장면처럼 네 형상만이 선명하다. 마찬가지라는 진실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당연하단 듯이 따라들어갔다. 한결같이 선명한 목소리엔 가시가 돋혀있었다. 유유히 타고 흘러들어와 무엇과도 섞이지 못한 채 덩그러니 자리한다. 예전의 네가 없다는 건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낙심했을 네게 용서나 자비를 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게 너였고, 이게 나였으니까. ... 철저하게 나는 이 공간에서 배제된 채다. ... 온기 하나 없는 눈빛이 여전하다. 마주보았고, 답을 들려줬다.) 거슬리는 장애물은 치워두려고 부른 게 진짜 이유인가.
Louis:사라져줄 것도 아니면서. (맞받아친 확신에 남지 못한 의심은 당신이 곁에 없던 시간이 담아주었던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저 태도가 사고를 키웠다. 꽃이 피지 않는 주제에 뿌리만 깊은 나무처럼 그저 밑으로 방향을 튼 것이 위로 나는 법을 모르는 듯했고, 그렇게 확신의 가지를 키웠다. 아, 저 녀석은 처음부터 마음이 없는 괴물인가? 하고.) 나 무시하는 건 잘하는데 말이야. 네가 좀 싫어야 무시를 하든 말든 하지. 뻔뻔한 게 저 간부들이랑 다를 게 뭐야? 그렇게 지구가 좋아?
Nigel:(슬며시 고개가 돌아가며 한순간 입꼬리가 위를 향해 흐릿하게 들린다. 맞다, 조소다. 점차 뒤로 갈수록 빠르게 식어 원래의 없는 표정으로 되돌아갔지만.) 관심은 끄지 못하나 봐, 루이.
Louis:안 되지, 나이젤. 남의 말은 똑바로 들어야지. (차마 접히지 못한 두 눈이 바짝 치켜졌다. 곱상한 외모에 날카로운 표정이 얼굴 위로 덮어졌다) 네가 미운 마음은 확실히 무관심과는 다른 것이지만 이걸 그딴 식으로 말하는 건 역시 불쾌하네. 지금 그게 중요해?
Nigel:거슬린다면 관심을 꺼버리면 된다는 걸 몰라서 이러는 건 아니라고 했던가. (시큰둥한 반응을 뒤로 근처 벤치에 조용히 앉았다. 땅을 쳐다보는 쪽이 말을 꺼내기 수월했다.) 그 이후로 네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라 피한 것 뿐이야. 이렇게나 날 싫어하는데 그 이유에 대한 답을 내가 설명한들, 네가 달라질까. 나야말로 궁금해... 네가 전처럼 웃을 일을 과연 내가 이룰 수 있기나 한 건지.
Louis:(피부 위를 기어오르는 이 질척한 감각을 떨쳐내지 못하도록 네 목소리가 기어코 방해를 한다. 해답을 부정하는 머리는 기어코 짜증 난다는 단순한 단어만을 내뱉으며 분노를 확장한다. 네가 말해주기만을 기다리던 초라한 자신을 잊은 것처럼, 이제는 어찌도 그렇게 당당한지) 야, 누구 앞에서 약한 척이야? 답지 않게 고민한 척하지 마. 제멋대로 구는 건 특기잖아? (버릇없이 뻗은 발이 어느새 당신 곁에서 발치에 있던 남의 신발을 툭 건드렸다) 그게 정말이면 진작에 날 찾아왔겠지. 헛소리 집어치워.
Nigel:... 그런 소릴 들으면 정말 오해할 것 같은데. (밀리면 밀리는대로 상관하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정확히는 많아졌다. 그동안 알던 모든 것이 알았다고 생각한 것이 될까가 두려워 말을 쉬이 하지 않았다. 오해의 싹을 틔운 것도, 감당하지 못할 크기를 만든 것도 모두 내 탓이었나 싶어서. 익숙해져버린 고통이 발목을 적셨다.)
Louis:(당신은 과연 '내가' 직접 이룰 수 있는지를 논했던가. 정곡이다. 그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당신의 사과를 들으며 모든 감흥을 배제하였으니. 타인이 자신을 휘젓는 걸 엄격하게 차단하였다. 그 결과가 이거다) 진실을 위해 움직이는 건 가능하고 사람을 위해 움직이는 건 무리였나 보네. (울화에 치민 소리가 아니다. 평온한 반응,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그런 감상이다. 역시 네가 그렇지, 나는 틀리지 않았어. 그딴 자만이나 되감고 있을 그다. 고민만 하다 끝낼 자식이었으면 애초에 그 일을 벌이지 않았겠지. 하지만 이 이상 이 주제를 꺼낼 정도로 고집스럽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쩐지, 불쾌의 영역을 침범하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맑다) 이렇게까지 싫을 수가 있나. 어차피 또 피해 다닐 거면서 자기만족이나 하겠다는 거야? (심심한 얼굴이나 하고선 고개를 돌렸다. 꽃이 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장소. 오직 이곳만이 식물의 생명을 허락하였고) 과거의 지구가 뭐라고 다들 이 난리인지.
Nigel:피하지 않는 걸로 만족할 수 있어?
Nigel:(자리에서 일어나 공간의 색을 바꿀 정도로만 자릴 옮겼다. 기껏해야 무릎을 정도의 높이를 아른거리는 지독한 튤립 향이다.)
Louis:(너랑 잘 지낼 생각 없다던가, 의미 없는 옛날이야기는 어찌되도 좋다는 대꾸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있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자신의 그 무엇도 내줄 의향은 없었고,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도록 돕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서 끝이다. 섞는 말은 유익하지 않고, 이런 사사로운 기복 따위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감추고 이용할 수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대꾸도 않고 들어왔던 곳을 향해 발을 돌렸다. ... 정확히는, 돌리려고 했다. 분명 본인조차 떠날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안개라도 낀 것처럼 자신의 생각조차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긋지긋하도록 선명히 기억하는 것, 그토록 지우고 싶었지만 결국 실패한 것. 부정한 인식은 뜻대로 먹혀주지 않았다. 바닥을 차던 시선을 끌어올렸다. 또 네가 있다.) 함부로 아는 척하지 마. 결국 아무것도 안 해줄 거면서 나한테 만족이란 말 꺼내지 말라고. (일그린 눈매가 가늘게 당신을 응시했다) 본인 입맛대로 살면서.
Nigel:하나만 묻자, I.
Louis:(인공적인 조명 아래, 찬란하게 넘실거리는 금빛 사이로 혼자만이 푸른 것이 스스로를 뒤섞는다. 오로지 자신뿐으로 들어찼던 백금색의 마음에 유일을 선사하러 온 것과도 같이. 넘어가는 배경 속 너만이 선명하다. 순순히 당겨진 것은 당연한 이치로, 움직일 수 없던 것이 아니라 멀어질 수 없을 뿐이라는 걸 알지 못하는 아둔한 자만이 이곳에 있었다. 하늘색을 싫어하던 그가 박차를 가한다. 넘치는 무언가로부터 그저 발버둥 치듯이, 붕 떠버린 손을 들어 허공의 어깨를 지면으로 내려찍었다) 이미 늦었어. (시린 것은 여전하다. 성질이 다른 것에 맞닿은 지점으로부터 시린 온도가 사무쳐 침투한다. 만들어진 빛을 등지며 상대를 어둠에 가두려는 것처럼, 혹은 그 뒷면을 가리려는 것처럼 흘러내린 선들이 푸름 주위로 장막을 이룬다)
Nigel:(이곳의 온도와 다름없이 미적지근한 숨소리, 숙소 구석에 쳐박아둔 온전한 것만이 나와 같이 시렸다. 가졌다는 건 착각이었고, 헛된 것이었나보다. 물리적인 감각이나 목숨이 아픈 것보다 욱씬거렸다. 언 심장이 찢어질 줄 모르고 깨질 줄만 알아서.)
Nigel:놓지 않는 게... 누구인데.
Louis:안 알려줄 거야. (그런 생각을 했었다. 너는 기억도 하지 못할, 단순히 시간이 지워버린 낡은 기억. 내가 너의 이름을 특별에 올리게 된 그 날. 지금까지도 여전히 꺼내 볼 수 있는 그 기억이 너에겐 없는 걸 보면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나 보다, 하고. 이제는 그 뜻이 변질된 특별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정도는 안다. 너도, 나도. 잘 아는데도 또다시 흔들려버린다. 도망갈 생각 마라는 그 말에 간단히도 응하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진심으로 벗어나려 하며 너를 미워할 수 있는 건 그것보다 더한 크기로 너를 증오하기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미소가 그 어떤 의미를 갖지 못했다는 것에 절망했기 때문에. 무언가를 바란 행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반동은 가감이 없었고, 나의 진심은 여태껏 겪었던 그 어느 순간보다 가치 없이 부서졌다) 이번에는 네가 모를 차례야, N. (가려진 얼굴을 끌어올려 몸이 바로 세워지니 콕 박힌 당신의 색이 아래를 내려다본다) 곱게도 말하네. (휘둘리지 않겠다고 정한 다짐이 오늘에서야 물러진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나를 이루는 것이니, 몇백 번을 반복한 지 모를 다짐을 수차례 되뇌인다. 찰나의 관심에 착각하지 않겠노라고. 공백을 책임지지 않을 사람 따위에게 자리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Nigel:그걸로 만족해? (도돌이표가 되어 입가에 머무를 말,)
기껏 오랜만에 나눈 대화건만, 관계의 사이에는 먹먹한 걸림만이 쌓여갑니다.
I는 불분명한 미래로부터 도망쳤습니다.
그 무엇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가진 거라곤 알 수 없는 체증만을 그렇게 속에 담고
N을 두고 화원을 빠져나옵니다.
반복되는 하루, 찰나의 일탈은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언젠가, I가 N을 다시 찾아오는 그 날에는...

먼저 말을 거는 건 오랜만이네.



지금 한 번이면 돼. 그래도 안 될까?

알았어.

... 정말로.

난 이걸 왜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잠시 중얼거리던 그는 꽃에게서 당신으로 시선을 돌려 말을 이었다.)
사실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야. 그냥...
너랑 둘이 대화를 해보고 싶었어.
이건 너를 이유가 되지 못할까?











눈을 감고 뜨는 순간까지 하는 게 고민이야.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게 없네, 우리는.
(정적이 한 번 감돌고나면 네가 입을 열기 전에 느리게 덧붙였다.)
미안해, 루이.


여지껏 별말없이 '잘' 지내온 걸 생각하면 그런 것만으로도 잘 지낼 수 있냔 말이야.
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이라면 비위나 맞춰주다 구슬리면 될 뿐인 일을, 굳이 오랜 시간 곁에 머물던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때도 지금도, 나는 네가 여전히 싫지 않아.

결국 마찬가지로 고독을 느끼면 위태로워지는 생물이라 일방적인 마음공세를 한 건지... (중얼거렸다.)
이기적으로 굴던 결과가 이래서야... 불쾌할 만도 하겠어. (널 닮은 향락을 향해 눈을 돌렸다.)


결국 날 향해 진심일 수 있었던 건 그저 보고 싶은대로 봐서 아냐?
그리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그 이유가 궁금해. (그 아집으로 뭉쳐있는 네 회로의 구조가 미칠 듯이 궁금해져만 간다. 그제서야 서서히 안개가 걷혀간다. 그 추악하고 고결한 심장을 가면 뒤에 용케도 숨기고 퍽이나 자상한 미소를 진심으로 내비친다는 게 신비롭기 그지없다. 입술이 불어터질 것만 같은 심정을 네가 알 수나 있을까. 끓지 않는 심장이 임계점보다도 아래도 치솟는다. 발 아래가, 눈앞이 너로 가득이다. 그들 중에 나를 바라보고 있던 단 하나만을 붙잡았다. 섬유에 손바닥이 닿는 순간에 접촉면이 절대적으로 얼어붙었다. 그리 간단히 잊을 수 있는 사이는 아니잖아. 무게중심이 꽃밭을 등진 채 뒤로 쓰러진다. 우릴 간직한 것들에 몸을 맡겼다. 이곳이라면 아프지 않다. 그것이 무지몽매라도, 아플 일이 없다. 지독한 향기에 휩싸였다. 시야에 검은 줄이 흐릿하게 새겨져있다. 반은 흐리고, 반은 선명하게. 노란 것만은 눈을 감아도 알겠다.) 기억도 하지 못하는 남을 도와준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거면서... 관심이 부족했던 건가.
내 방에, 왜 이게 있었는지 궁금하다면 알려줄까, I.
내게 무엇도 바라지 않는 네 미소가 궁금해서 그랬어. 다른 것도 궁금하면 알려줄까.
네 말대로... 대화를 하려고 왔으니까, 도망갈 생각 마.

말도 없이 떠났잖아.
(침입한 것은 내가 아닌데도, 불안정을 택한 네가 어쩜 그리 평온해 보이는지. 점차 압박하는 손이 그의 힘을 보인다)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어. 아무것도. 인제 와서 그런 말을 해봤자 의미가 없다고. (낮춰진 고도에 서로의 시야가 엇갈린다. 틀어진 목이 두 머리를 나란히 두고, 지면에 이마를 닿게 한다. 보이는 거라곤 노란 꽃잎의 프레임이 씌워진 이곳의 천장, 들리는 거라곤 귓가의 작은 한숨 정도일 터다. 부스럭 돌아간 말의 입구가 상대를 향해 희미한 음성을 만든다)
이제 좀 놔 줘.

결국... 그때도 지금도, 나는 네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거구나.
(숨소리도 내지 않는 간극이 늘어졌다. 아무런 것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붕 뜬 허공이 건조하다.)
.. 그럼 그때 왜 붙잡았어
내가 말 없이 떠난 게 네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네게서 먼저 떠나간 게 잘못이었니. 도리어 네 몇 마디에 돌아온 나로는 턱없이 용서가 안 돼?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타심이란 무언가에 대해 생각해보지만 우리에게서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나보다. 무기력과 상실감에 가슴 한 켠이 바스라진다, 정적보다도 조용하게. 돌이켜보니 널 위해 나는 무얼 하고 있었지. 늘 그랬듯 얌전히 있었을 뿐이다. 노란 빛에 안주해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 흘러가지 않는 모든 흐름을 방관했다. 홀린 듯이 머물렀던 공간에서 탈피할 때가 오나보다. 잡는 이 하나 없는 지면에 발목을 묶고 있었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나? 의식 따위가 잿바람이 되어 부서진 꽃잎을 따라 상공에 흩날렸다. 드디어 트인 시야는 여전히 가로막혀 있다는 걸 알 때면 무력보다도 더한 허탈에 잡아 먹혀 오히려 숨이 트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홀연히 가버리면 될 텐데.)

내가 네게 괴로운 존재이면 좋겠어.
(그것만이 마음 없는 괴물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네게 아무것도 아닌 나로서는 그 어떤 것도 닿지 않을 것 같았다.
증오라도 좋으니 네 감정을 보고 싶다.)

... 한 순간도 널 알았다 생각한 적 없어. (지금 너는 날 알고 있다는 소릴까, 네가 내게 어떤 존재로 남아있는지를 아냐는 말이다. 의미없는 의문이다. 네게 어떤 존재로 비춰졌을지, 나 역시 생각해본 적 없기 때문이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이곳에는 안개만이 자욱하다. 테두리 바깥으로 벗어난 시야가 뿌옇기만 해, 손을 휘젓고 고개를 아무리 두리번 거려도 길을 찾을 수가 없으니 영원히 헤메이다 사력이 쇠할 때 즈음이면 아마 지면에 눈을 붙이고 있겠다. 손에 잡히지 않는 연무 한가운데서 홀연하다. 행동하지 않은 나의, 이 또한 사죄가 된다면 기꺼이, 폐부에 들어찬 시린 숨이 목을 조른다. 어느 것이 괴로웠다. 과오가, 현재가, 우리의 모든 것이라 여겨질 만큼 마신 숨통에 가슴께가 짓눌리는 것만 같다. 일어선 그는 여전히 빛을 받고, 빛을 가로막고 있었다. 등을 여전히 뉘인 채로 바라보지 않았다. )
(한 편으론 밉기도 하지, 증오하지 못하는 내가 안쓰럽긴 커녕 알아채지 못한 감정이 막연해 목구멍이 따끔거린다. 말처럼 사라져주는 것이 최종의 행복이 되어줄 수 있다면 나는 질식할 수 없는 이 지독한 향에 질식하고 싶다. 이기적이게도 완벽한 이상향을 그렸던 추억 속에 잠겨있고 싶다. 깨닫지 못한 과거를 바랄 줄은, 너는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와 같은 통증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널 도왔던 이유도, 분명 이런 이유였을 테니까. ... 이미 네게 괴로웠을 존재였나, 나는. 뒤늦은 후회에 뜬 눈을 감았다.)
... 지금도, 나는 네가 여전히 싫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