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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30. 16:34
작성자
81-

이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면 알 수 잇다.. 

여름이 심장에 꽂히는..그래...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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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C 시나리오
 
「여름을 말려 심장에 꽂는 법」
 
w. Team. Ganada
 
kpc. 강서하
 
pc. 권 백
 
지금 시작합니다.
 
-
 
새벽을 적시던 비는 어느새 폭우가 되어 내리는 중입니다.
 
개학을 하루 앞둔 지금, 권 백은 집에 홀로 남아있습니다.
 
말발굽 소리처럼 휘몰아치는 비, 색을 잃은 잿빛 하늘, 습한 여름.
 
기승을 부리는 여름은 꺾일 기미 하나 보이지 않으매 비는 더위를 감추지 못합니다.
 
특별한 것 없는 일상입니다.
 
백이 괜히 강수량에 대해 떠드는 뉴스에 집중하다 보면,
 
권 백, 듣기 판정
 
권 백: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34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쏴아아-
 
끊이지 않는 빗소리, 그 사이 이질적인 소리도 함께 들립니다.
 
“8월 하순을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의 강수량이….”
 
빗소리보다 조금 더 거칠고, 무게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앵커가 무어라 하든, 그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지니까요.
 
“새벽부터 시작된 비는 전국을 강타했습니다.”
 
--
 
“시간당 100mm로 인천 전역을 시작해 전국에 호우주의보가 내려졌으며,”
 
-똑
 
“기습폭우로 인한 피해 역시 속출하는 중입니다.”
 
똑똑.
 
확실하게,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택배를 시켰던가요?
 
누가 집에 방문하기로 했던가요?
 
기억을 더듬어도 방문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백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팟-
 
몇 가지 소리와 함께 가전제품들의 불이 꺼집니다.
 
정전입니다.
 
우중충한 하늘 덕에, 잿빛이 슬금 들어온 집안은 낮임에도 어둑하네요.
 
인터폰마저 지직, 뚝.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끊이지 않습니다.
 
어째 예감이 좋지 않네요.
 
문을 열어줄 건가요?
 
아님, 조용히 그 누군가를 무시할 건가요?
 
권 백:... 씨... ... 뭐야? (꺼진 불에 반사적으로 고갤 들어 전등을 째려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현관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가끔은 이런 재수없이 희안한 일만 닥치는 날도 있는 법이었으니, 그것이 오늘일 줄이야. 하필이면 폭우라니. 무의식 중에 이를 앎에도 짜증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성이 그랬다. 현관까지 다가가는 걸음마다 신경질이 가득하다. 방문한 이에게까지 화를 내는 건 아니지, 이 정도의 관념이라는 건 존재하는 단순무식한 이다.)
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현관의 문을 연다.)
 
여전히 불 하나 켜지지 않은 실내는 어둑하기만 합니다.
 
문이 열리고, 문 앞에 선 상대를 확인하면…
 
뚝, 뚝.
 
흥건히 젖은 바닥이 보입니다.
 
그리고, 물벼락을 맞은 듯 푹 젖은 옷을 입은 서하도 함께.
 
빗물이 방울방울 매달린 머리카락, 하염없이 물이 떨어지는 옷, 또….
 
강서하:..선배.
 
당신을 부르는, 파리한 인상의 강서하.
 
권 백, 심리학 판정
 
권 백:
심리학
기준치: 30/15/6
굴림: 13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서하의 불안한 눈길이 당신을 향합니다.
 
한참을 살피더니, 이유 모를 한숨도 함께 뱉네요.
 
강서하:괜찮은 거예요?
 
…무엇이?
 
그리 묻는 서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고칩니다.
 
아까처럼 목소리를 떨지 않고, 그저 태연한 낯으로.
 
우산이 없어 백의 집을 방문했다는 이유도 함께 덧붙입니다.
 
우선은 젖은 서하를 집안으로 들이는 게 좋겠죠.
 
권 백:야, 너... (한눈에 보아도 폭우 속에 흠뻑 젖은 널 보고 눈이 크게 뜨인다.) ...뭐라는 거야, 일단 빨리 들어와. (현관문을 크게 열어제끼곤 안으로 들어오란 듯 손짓했다.)
밖에 우산도 없이 왜 돌아다녔냐, 멍충아. (얄궃은 소릴 하는 건 너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섭섭함이었다.)
 
강서하:멍청이.. (그 말이 귀에 맴도는지 중얼거리듯 곱씹었다가도 별 거 아니라는 듯 평이한 어조를 낸다. 그야 저게 저를 걱정해서 나온 말이라는 것 정도는 이제 잘 아니까.) 선배.. 집에 오려고 그랬나보죠. ... 농담이에요.
(그럼, 실례합니다. 낮은 어조로 말하고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에도 제게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신경쓰이는 건지, 신발장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바닥 젖을 것 같은데.. (괜찮냐는 듯이 힐긋 너를 바라본다.)
 
권 백:(한심스런 숨을 쭉 내쉬었다. 파리한 인상을 바라보는 얼굴이 걱정스럽다는 듯 구겨져있다.) 그 얼굴에 잘도 농담이 나오셔~ (무심하게 손등을 들어 네 뺨에 묻은 빗물을 제 손에 문지른다.)
됐어, 수건 까는 게 더 귀찮아. (괜찮으니 그냥 들어오라며 빠르게 손짓했다. 어디서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가지곤. 차라리 평소같이 말이라도 했으면 걱정이 덜 됐겠다.)
 
강서하:... (뺨을 스치는 손길에 가만히 너를 응시한다. 참, 평소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바닥 위로 발을 옮긴다. 축축한 것이 집에도 옮을까 신경이 끊이질 않는지 제 발치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가 그냥 관두기로 했고.) 저한테는 줄 거죠? 수건. (설마 안 줄 건-.. 그 특유의 덤덤한 목소리로 진담 같은 농담을 던졌다.)
 
백은 서하를 데리고 집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네모난 상자 속 [뉴스]는 여전히 이번 기습폭우를 다루고 있으며, [화장실]에서는 뽀송한 수건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아, [부엌] 찬장에 고이 모셔둔 티백으로 차가운 서하의 몸을 녹일 수 있겠네요.
 
[서하]는 젖은 탓에 어디에도 자리잡지 않고 그저 우뚝 서 있습니다.
 
권 백:얌전히 여기 있기나 하셔. (가늘어진 눈으로 쏘아붙이곤 화장실에 들어가 수건을 가져오려 발을 돌린다.)
 
강서하:... (네 말에 정말 얌전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 번 주억거렸다. 그러다 나름의 장난이라고 꺼내는 말이,) ..사고 안 치고 있을게요..? (힐긋)
 
습기 가득한 눅눅한 하루라 해도 수건은 뽀송한 게 제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다.
 
수건을 꺼내던 권 백, 관찰 판정.
 
권 백: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12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문득 가지런히 놓인 칫솔이 눈에 밟힙니다.
 
…원래 저런 색이었던가요?
 
권 백:... 응? (가볍게 손에 수건을 쥐고 다시 문턱을 넘으려던 순간, 눈에 들어온 별거 아닌 칫솔에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무언가 이상해 칫솔을 집어들고 힐끗 보나,)
 
칫솔을 자세히 보면 그저 사용감만이 두드러진, 평범한 칫솔입니다.
 
기분 탓인 걸까요?
 
권 백:(역시 별거 아녔나보다.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고 문턱을 넘어 장난 안 치고 잘 기다려줬을 네 이름을 불렀다.) 야, 강서. (이쪽을 보면 들고 있던 수건을 휙 던져줬겠지.)
 
강서하:(네가 뒤를 돈 순간부터, 네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 뒷모습만을 바라보다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때서야 주변을 살펴봤다. 조금은 익숙하지 않은 구조, 남아있는 너의 흔적, 그리고 미묘한 체향..) ... ...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서 어쩌면 멍하니, 그게 아니라면 제 성정대로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가 네 목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네? (고개만 돌린 탓에 던져진 수건에 한 번 부딪히고 나서야 떨어지는 수건을 급하게 낚아챘지만.)
..깜짝이야. 저 놀라서 못 받을 뻔 했어요. (흐트러진 모양을 바르게 잡아서는 세수하듯 얼굴에 묻은 물부터 닦아낸다.) 고마워요.
(그 자리에 바로 서서 꼬깃꼬깃 얼굴 닦는 중..)
 
권 백:(아슬하게 수건을 낚아채 제대로 물기를 닦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걱정은 안심으로 물들어간다. 온통 네게만 집중되었던 시야가 넓게 트인다. TV에서 여전히 이번 폭우에 관한 뉴스만을 다루고 있더라. 쏟아지는 빗줄기와 그 비에 젖은 너, 짙은 연관성에 절로 비 소식에 고개가 돌아갔다.)
 
“기습폭우에 의한 피해가…”
 
주간 날씨를 알려주는 화면은 온통 먹구름으로 가득합니다.
 
비, 비, 그리고 비.
 
여름철 장마는 흔한 일이라고 하지만, 전국을, 그리고 한 주가 비로 가득한 건 이번 여름 중 처음입니다.
 
“유명 스포츠 선수 A씨의 은퇴 사실에 관한 루머들이…”
 
권 백, 지능 판정
 
권 백:
지능
기준치: 55/27/11
굴림: 4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스포츠 선수 A씨의 은퇴 사실이라니.
 
처음 듣는 내용인 것 같은데, 다음으로 다루는 뉴스 내용은 낯설기만 하네요.
 
권 백:(뉴스 내용을 들어도 떠오르는 생각은 별달리 특별할 게 없다. 그저 귀를 통해 정보를 전달받는 단순함이 전부였다. 바뀐 뉴스 내용에 너를 다시 쳐다보더니,) 소파에 그냥 앉아있던가. (전신을 물끄러미 훑곤,) ...옷이라도 빌려줄까?
 
강서하:그럼 소파 젖잖아요. (어느새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약하게 털어내고 있었다.) ..? 어.. 그래도 돼요? 금방 있다 갈 건데-..
 
세찬 비를 맞은 탓인지 서하의 낯은 평소보다 더 창백합니다.
 
그 외 평소와 다른 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평소와 다른 점이…
 
권 백, 관찰 판정
 
권 백: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2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찰나, 서하의 손목 안쪽으로 여린 푸른빛이 반짝거립니다.
 
분명 어떤 형태를 이루면서요.
 
권 백:갈 거야? (베란다 창밖을 굳이 보지 않아도 귓가를 때리는 빗줄기가 시원하다 못해 아플 정도더라.) 그 젖은 옷 입고 다시 갈 거면 왜 온 건데? (거칠 뿐인 발화방식이지만, 이렇게 공격적으로 말해야 네가 주춤해서라도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아서.)
(삐뚜름한 얼굴로 바라보던 찰나, 손목 안쪽의 푸르스름한 빛이 눈동자에 깃들었다.) ..? 야, 강서 너, 손목에... (냅다 손을 잡아들었다.)
 
강서하:? 가야죠. (네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돌아가야죠. 덤덤하고도 결의가 담긴 것마냥 단단한 목소리로 말하기도 잠시, 뒤를 잇는 질문에 벌어진 입에서 할 말을 찾는 침묵이 인다.) ..그야, 선배가 여기 있으니까-..
(무어라 덧붙일 말 없이 너를 응시하다가, 저를 잡아채는 손길에 낯이 순식간에 의문으로 차버린다.) ..? 왜요?
 
백이 급하게 다시 살펴보면 서하의 손목은 멀쩡하기만 합니다.
 
권 백:그게 무슨... (찌풀)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좀. 내 집에 내가 있는 건 당연한 거고... (무언가 말이 이상한 듯 싶어 고개나 시선 따위가 살짝 기울었다.) ...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온거야? (제 생각이 틀렸다면 그건 그거대로 웃어넘길 일이고. 맞다면 맞는대로... , 허, 하고 작게 터져나온 숨소리 탄식 앞에 옅은 미소가 낀다.)
(그렇게 고갤 내려 바라본 손목에는 그저 빗물에 촉촉해진 여린 안쪽 살갗만이 온전히 드러난 터였다. 헛것이었나?) 음... 아냐. (쉽게도 손목을 놓아준다.) 아무튼 그럼 잠깐 서있던가. (옷부터 가져다줘야 하나, 잠깐 닿은 피부표면이 차갑게 식어있었던 것이 머리에 자리한 까닭에서 대체할 옷가지보단 체온을 높여주는 게 우선시 된다. 평소 잘 손도 안대던 차를 준비해보려 부엌으로 발을 돌린다.)
 
강서하:... ... 맞는-.. ... ..데.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긴 하지. 나는 너를 보러 지금 여기에 있는 거니까. 그런데, 네가 말하는 문장의 뉘앙스가 무언가 이상해서. 저도 모르게 낯간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저 선배 보러 온 거 맞아요. 그렇게 쉽게 말만 하면 되는데.)
... ...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너를 바로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시야에 대신 채울 것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붙잡힌 손목에 하야멀건 눈을 두었다가, 천천히 입을 떼어낸다.) ... 그냥 받기 미안해서 그런 거니까-.. ..정 신경 쓰이면.. 주세요. 선배 옷.
... (그리고는 다시 발을 돌리는 널 보고는 이번엔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서 너를 보내준다. 사고는 안 칠 건데, 왜 벌써 사고를 친 기분인지 모르겠다. 괜히 쭈뼛거리는 뒷목만 손으로 쓸었다.) ... ... ... (왜 긴장되지.. ..바보 같아.)
 
부엌 찬장에는 티백이 여러 개 놓여 있었습니다.
 
어디서 받았던 건지, 직접 산 건지 기억은 흐릿하지만요.
 
백이 찬장 문을 열어보자..
 
덜컹, 내부는 텅 비어있습니다.
 
분명 많이 남아있었는데, 함께 사는 가족이 모두 먹었을까요?
 
지금 서하에게 줄 수 있는 건 따듯한 물이 전부입니다.
 
권 백:(나름 곤란한 기색을 띄웠을까, 괜히 머쓱해졌다. 찬장의 문을 닫고 따듯한 물이나 잔에 받아 네 앞으로 돌아온다.) 누가 그냥 준데, 이거나 마시고 있어. (오늘따라 유독 틱틱거리는 것만 같다. 그럴만 한 것이, 여지껏 누구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챙겨줘 본 적이 있었을 리가 만무했으므로.)
(제 방으로 가 옷장 안을 뒤진다. 네게 맞을 적당한 옷이 있나 모르겠다. 옷걸이의 고리 부분이 쇠걸이에 끌려 요란한 소릴낸다. 옷을 보고 있자니 네게 맞을 사이즈를 찾기보단 네게 어울릴 옷을 찾고만 있는 것 같아 제법 큰 목소리로 너를 불렀다.) 강서~ 이리 와 봐.
(직접 위에 대고 봐야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덜 할 것 같았으니까.)
 
강서하:아, 감사합니다.. (물이네. 따뜻하다. 일순 손 안에 퍼지는 온기에 절로 복잡하던 생각이 날아가는 것만 같다. 제 시야 안에 들어온 너는, 다시 자리를 비웠으니 그대로 양손 안에 잡혀있는 물이나 가만히 내려다본다.)
... ... 뜨겁나..? (쓸데없는 고민에 사로잡혀 있기도 잠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얼른 물을 후 불어서 한 모금을 삼켰다.) 잠시만요-. 지금 가요.
(컵을 어디다 두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쇼파 앞 테이블 위에 조심히 내려둔다. 그리고 너에게 걸음을 옮기기 전에,) ... ... (한 번 더 물을 삼키고 네게로 향했다. 따뜻해서 좋네.)
선배.. 불렀어요? (쭈뼛..)(두리번)
 
권 백:스읍... 네 사이즈에 맞는 게 있는지 모르겠다... (뚫어져라 옷장에 안에 걸린 옷가지를 손으로 제쳐 보다 이내 서랍장을 열고는 흰의 라운드 티셔츠 하나를 꺼내어 네 위에 대본다.) 음... (입술을 삐뚜름 내밀다가,) 박스티는 아닌데... 좀 커보인다? 됐다, 이거 입어. (그 옷이 제가 가진 옷들 중에 체형을 가장 꼭 맞춘 옷이었으니 말이다. 더 작은 옷은 없다. 손에 대충 쥐어주고는 검은 츄리닝 팬츠까지 들려주고 나면 서랍을 닫는다.) 입고 나와, 거실에서 기다릴게. 네 옷은 그냥... (물끄러미 쳐다본다.) 들고 나와라. (가볍게 한쪽 입꼬리를 피식인다. 다소 거친 듯 가벼운 손길이 네 머릴 마구잡이로 스치고, 방문을 닫고 나간다.)
 
강서하:..? (제 앞으로 담뿍 다가온 옷에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불투명한 눈으로 그런 생각을, 티가 나게 드러냈나. 입술 모양새까지 바꿔가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네 모습 탓에 무어라 반박도 할 수 없었지만.)
... 선배.. (패션쇼 하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요. 불쑥 올라온 생각을 손에 들려진 옷의 무게가 꾹 눌러 내린다. 딱 편하고 간단한 차림새가 될 게 뻔했다.)
... (이토록 순식간에 또 시야에서 벗어난 너 대신, 닫힌 문을 바라본다. 참 신기한 사람이야. 제 좋을대로 들어와서, 제가 알지도 못 하게 저를 쓸어버리고 간다. 딱 그 모양새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가, 쥐어진 옷을 침대 위에 조심히 두고 옷을 벗기 시작한다. 네게선 드물게 보이던 붉은 넥타이, 몸의 윤곽을 어렴풋이 보이는 검은색 셔츠. 가는 허리를 감싸고 있는 벨트를 풀어서, 품 하나 없이 다리에 달라붙은 바지를 힘겹게 벗어냈다. 흰 양말로 차례대로 벗어 최대한 좁은 공간에 몰아두고 수건으로 몸을 마저 닦는다.)
... ... (남의 방에서, 그것도 네 방에서 이러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이상해질 법도 하지 않은가. 이윽고는 수건마저 바닥으로 툭 떨어뜨리고 나서 네가 골라준 옷을 급하지 않게 입는다. 흰색 라운드 티셔츠에, 검은색 츄리닝 바지. 키야 엇비슷할지 몰라도 체격 차이가 있는 탓인지 남아있는 품이 제법 넉넉했다. 그리고-..) ... ...
(선배 냄새. 그 생각에 홀리듯 옷을 들어 제 고개를 박아본다. 눈까지 감고서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가, 나직히 날숨을 내뱉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한참을 굳어 있었지만.) ..? ..?? ...???
(뭐야. 미쳤나봐. 나.. ..변태인가? 혼란스런 생각에 어느덧 붉어진 눈가를 가라앉히려 연신 손부채질을 하다가, 이러다 네게 들킬까싶어 얼른 뒷정리를 한다. 젖은 옷을 깔끔하게 개고, 옷이 있던 바닥을 수건으로 닦고서, 어쩐지 숨이 차보이는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강서하:... ... ... 선배. 다, ... 입었어요..
 
권 백:(소파에 털썩, 등받이에 등을 붙이고 앉는다. 괜한 시선이 제 방문에 꽂힌다. 지극히 개인적일 공간 안에 어떠한 다른 이도 아닌 네가 저 안에서 내가 골라준 옷을 갈아입고 있다. 언제나 목을 꼭 조이던 넥타이를 풀고 젖은 셔츠를 벗어, ... 생각을 멈췄다. 마른 침을 삼켰다. 고의는 없었다.) ...
(잡념을 떨치려 그에서 고갤 돌리고 창밖을 바라본다. 여전히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돌아가는 건 글렀지, 글러먹어야지. 오늘은 날씨가 나쁘지 않은 듯 싶다.)
어, 사이즈는, 괜찮아? (조바심이 날만큼 줄어든 음성에 일제히 시선이 꽂힌다.) ...좀 크네. (평소 알던 핏과는 다르게 네 어깨에 걸려 널널해진 품이 제가 알던 분위기와는 색다르게 느껴졌다. 부러 장난스레 히죽 웃고는,) 그대로 자고 가도 괜찮겠다?
 
강서하:아.. 네. (방금 제가 저지른 일 덕분에 네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질 못 하겠어서, 멀직히 아래만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그래도.. 작은 음성으로 이르는 내내 손가락을 꼼질거린다. 이러면 네가 무슨 일이 있었다고 눈치챌 것만 같아, 얼른 호흡을 갈무리했다.) ... 선배는 제가 자고 가도 괜찮아요?
 
권 백:불편하면 말고~ (지금 의지해서 좋을 사람은 나뿐이라 믿었으니, 부담을 주어 도망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도 네가 편했으면 했으니까.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나를 찾아와준 네가 기특하고, 애틋한 감정이 들었으니 말이다.) 비 그칠 때까지만 있던가. 알아서 해, 와서 편하게 있어. (말인 즉슨, 옆에 와 앉아도 좋다는 신호였다.)
 
강서하:... 불편한 거 아니에요. 그냥, (머뭇거리는 양 입을 다물고, 아직 덜 마른 제 앞머리칼이나 만져댄다. 남은 말을 꺼내기 이전에 걸음을 먼저 옮겨 젖은 제 옷을 바닥 한 켠에 내려두고 네 앞에 섰다. 힐끔거리며 네게 시선을 두었다가 곧바로 거두었다.) ... 다음에 왔을 때, 오래도록 자고 가도 되나 해서-..
..그때는, 왠지.. (저와는 영 어울리지가 않는 말이다. 낯선 탓에 간지러운 뺨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떨어지기 싫을 것 같거든요. 선배랑..
... 당분간만이요. 당분간만.
오래 안 붙어 있어요-..
 
권 백:(열린 네 말문에 고갤 갸웃거린다. 무슨 말을 못해서 저렇게 안절부절 못한대. 하나 둘 불규칙하게 이어붙는 음절마다 뻔뻔스레 맑던 얼굴이 점차 열이 오름을 느꼈다.) ...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스스로 알고 있는 거야? 묻고 싶은 것이 다물린 입 안에서 맴돌다 삼켜져 내려간다. 그대로 웃는 것을 지우지 않고, 태연하게 반응.) 자고 가려면 당연히 오래 붙어 있어야 되는 거 모르냐? 순수하긴... (아무렴, 너는 순수한 채로 있어줘야지. 가끔은 그게 애가 타다 못해 속이 시꺼멓게 타버릴 지경이었지만 자꾸만 그런 소릴 들어버리면 느슨하게만 선을 그리던 끈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져 결국엔 끊길 게 뻔하잖아. 더운 열이 귓바퀴를 맴돌았다.)
 
강서하:... 며칠 내내 머물고 싶다는 건데. (혹시 제 말이 이해하기 어려웠을까, 생각해서 덧붙이는 게 어쩌면 답답할 수도 있고, 어쩌면 저다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 ... 싫으면 말고요. 저도 선배 싫은 짓은 안 할 거니까-.. (손으로 제 뒷목을 한 번 쓸며 태평한 척 네 옆자리에 앉았다. 왜 이런 괜한 얘기를 한 건가 싶다. 역시 네 옷을 빌리지 않는 게 맞았을지도 몰라. 그럼 이런 이상한 기분 같은 거, 들지도 않았을 거고 너한테 이상한 말도 안 했을 텐데.)
(느긋해지기 위한 긴 날숨. 그 끝에 고개를 돌려 이제서야 너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선배네 부모님도 계셔서 몇 날 며칠을 자고 가는 건 무리겠네요. 그냥 농담이라고 생각하세요.
 
권 백:너... 농담 못치는 거 알지, 강서. (포인트를 완전히 빗나갔던 탓에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정말 그 때문에 열이 훅 달아오른 게, 맞기는 한 걸까. 무엇 하나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없다. 단 한 가지, 그런 식의 장난을 치는 네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웠다는 것 말고는. 어쩌면 이해하려 들지 않는 걸 수도 있겠다. 단단히 착각해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강서하:어.. 그런 편이라고는 하던데. (아무래도 제가 농담을 하면 다들 진담으로 알고들 했지. 그래도 친한 이에게는 장난을 안 치는 게 아니라서, 너한테도 불현듯 농으로 이루어진 말이 툭툭 튀어나가긴 하더라.) 그래도-.. 방금 한 말은 농담 아니에요.
선배가 싫어할 것 같으니까 농담이라고 생각하라 한 거지.. (그렇게 말 의미를 바꿔서 내뱉은 건, 거절의 의미 아니었냐는 식으로 너를 빤히 바라본다.)
 
권 백:옷까지 입혀주니까는... (차라리 라면 막고 가겠다던가. 그런 쪽이 더 내가 알아듣기 쉬울 거 아냐. 그렇다면 이쪽은 너답지 않게 정말 농담으로 들려버릴 게 뻔한 답이다. 점잖게 식지 않는 열기에 고개를 돌렸다.) 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 (중얼거렸다.)
 
강서하:..? (저야 제가 왜 이런 태도인지 알아도, 지금 보이는 네 태도는 도통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내가 어두운 탓에 네 얼굴이 붉은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솔직히 듣고 싶은 마음은 있어서, 네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래서, 싫다는 거예요, 좋다는 거예요?
저 나중에 선배 집에 자러 와도 되는 거예요?
 
권 백:(붙잡힌 탓에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내려갔던 시야를 들면 투명한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아버린다. 얘가...오늘따라,) ... 싫나 좋으나 그게 다 뭔 상관인데? (그 손을 슬쩍 잡아 떨어트려 놓으려던 것을 관둔다.) 오늘도 멋대로 찾아온 주제에.
...마음대로 해.
 
강서하:... 선배 옆에서 자고 간다는 건데 당연히 상관 있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럼 네 집에 온다 해놓고 다시 제 방으로 가서 잘까봐. 확실히 떨어지지 않는 대답에 꼭 작은 심통이라도 난 것 같은 눈빛으로 널 보다가 그대로 네게 폭 기대버린다. 맘대로 하라 했으니까, 그럼 맘대로 해야지. 널 붙잡은 손도 놓지를 않았고.) ..그럼 자러 올래요. 선배 괴롭히다 가야지-.. (정작 네가 싫다면 안 할 게 뻔하지만, 말이라도 뱉어둬야지 싶었다.)
 
권 백:너 지금 이러는 거 되게, ... 그런 거 알고 있냐.., (말문이 한 번 꾹 막혔다가 나른하게 새나간다. 살짝만 아래를 향해도 보이는 검은 머리칼에서 옅은 물비린내가 난다. 그 속에 감춰진 따끈한 체온이나 체향따위가 닿은 자리에서 웃도는 것에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젖히며 애먼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빠지는 맥박을 들킬까, 심장이 작아들기를 바라면서.) ...그러다 사고 당해도 난 모른다.
 
강서하:제가 어떤데요? (낯설어요? 그리 물으려던 것을 삼켰다. 어떤 말이 나오든, 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듣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찾아온 덕분이다. 넓게 펼쳐진 공간, 무언갈 끊임없이 내보내는 텔레비전. 시선은 앞을 향해있지만, 시야 속에 들어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간혹 네 말에서 의문이 차면, 이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을 존재에게로 시선을 돌릴 뿐이다.) ..? 사고요? ..무슨 사고?
 
권 백:(눈치도 없이 나 지금 어때요, 같은 소릴 잘도 내뱉는다, 너는. 무슨 짓을 해도 특이점이라곤 놀라움 하나 뿐이었던 너라서 어떤 짓을 남에게 일삼아도 괜찮은 거겠지. 억측을 꿰어내며 살짝은 억울한 감에 혀를 한 번 찼다.) ... 모르면 가만히 당해야지, 궁금한 것도 많네. 그만 물어. (죽기 밖에 더하겠냐? 시비 아닌 도발을 네가 눈치나 챌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문외한에 둔감하기까지해서 이쪽을 자꾸 건드는 줄도 모르겠지. 얌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해도 싸다, 너는.)
 
강서하:..? ... (정말이지, 네 모진 말은 항상 예측할 수 없을 때에 찾아와서 그 흔한 대비조차도 못 하겠다. 이럴 때면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알겠다며 넘어가는 것밖엔 없어서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제서야 제가 누구에게 기대어 있는지 실감이 났다. 서늘한 깅운이 남아있는 검은 머리칼, 네 체향이 잔뜩 묻은 넓은 옷자락, 조금이나마 되찾은 온기도 다 네게서 온 거겠지.) ... 알겠어요.
(이대로 계속 붙어있으면 언짢아 할 것 같아, 잔을 가져오는 척 하며 네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의심사지 않게 한껏 식은 물을 두어모금 들이켰고. 싫으면 싫다고 해도 될 텐데. 그럼 제가 괜히 오해하는 일도 없을 테고, 주춤거릴 일도 없을 텐데. 그나마 이전에 큰 오해를 풀어둬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네가 저를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라고, 어림짐작이나마 할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서 네가 저를 싫어하게 되는 건-.. 무엇보다 말리고 싶은 상황이니까 제가 입을 다무는 편이 어딜 봐도 현명했다.)
(... 너는 내가 지금 너를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하고 있는 건 알까? 이렇게 생각하니 뭔가 착잡해지기는 한데, 아마 아닐 테니까-.. ..상관없겠지. 괜한 물이나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권 백:...(뭐야, 싱겁게. 아쉬움을 남기고 떨어지는 잔흔에 시선이 머물러버린다. 뭐야, 라고는 생각해도 이러한 상황은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잡아당기면 휩쓸려오고, 밀어내면 밀어내는대로, 그러다 가끔 생각지 못한 부분을 순수하게 집착해온다. 집착점이 누구와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이었기에 양심이 찔려서? 아니, 우리한테 미안해서 밀어냈다. 원흉이 무엇인지를 안다. 알면서도 고치지를 못한다. 이유가 뭘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가 날 봐주지 않을 것 같아서. 라는 초라한 이유를 붙여도 좋은 걸까.) ...
(이 뒤로는 말이 없어졌다. 할 말도 없거니와, 너를 보는 게 어색하다는 이유로 팔을 내리고는 관심도,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화면을 멀겋게 쳐다보고만 있었으니.)
 
쏴아아, 비는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말발굽 소리처럼 휘몰아치는 비, 색을 잃은 잿빛 하늘, 습한 여름.
 
어느 정도 물기가 마른 서하는 간간이 멍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질적인 하루입니다.
 
폭우와 정전, 빗방울과 서하,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여름.
 
내일은 개학식이니 서하도 오늘은 집에 돌아가야겠죠.
 
폭우에 서하의 가족이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따금 서하와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다 보면...
 
♬ minamo
 
강서하:선배.
 
당신의 호칭이 허공을 둥둥 부유합니다.
 
나지막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사뭇 진지한 표정의 그가 보입니다.
 
서하의 손목에 새겨졌던 빛이, 헛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이.
 
당신만을 오롯이 담은 그 눈에 푸른 빛이 스칩니다.
 
동시에, 서하의 피부 위로 기하학적인 형태의 무늬가 그려집니다.
 
마치 별자리처럼……
 
지금 백은 무얼 보고 있는 거죠?
 
강서하:이번에는 잘 될 거예요.
..기억할 수 있죠?
 
권 백, 듣기 판정
 
권 백: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62
판정결과: 보통 성공
 
백은 지금 이 상황, 이 공간이 너무나도 고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비가 그쳤던가요?
 
창밖을 바라보면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비는 허공에 방울방울 ‘멈추어’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둥근 물방울의 형태를 가지고서.
 
이해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권 백, SAN 체크
 
권 백:
SAN Roll
기준치: 65/32/13
굴림: 3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성치 감소 없음
 
강서하:이번에는 학교에서 만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당신이 무어라 말하든, 서하는 백의 손을 강하게 마주 잡고 눈을 감습니다.
 
피부 위로 새겨진 무늬는 서하를 집어삼킬 듯 반짝이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숨을 쉬기도 어렵습니다.
 
별자리가 촘촘히 수 놓인 서하에게서, 우리에게서 빛이 쏟아집니다.
 
중력이 배로 느껴지는 기분에 속이 울렁거려요.
 
허공에 방울방울 매달린 비는 여전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하가 입 모양으로 어떤 말을 전합니다.
 
하나,
 
둘,
 
셋.
 
 
깜빡.
 
 
 
 
“이번 주 내내 맑은 날씨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며, 열대야 역시 지속적으로…”
 
창밖은 맑으매 푸른 하늘은 눈이 부십니다.
 
무더운 여름은 건조한 탓에 비는 내리지 않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립니다.
 
권 백, 당신의 손을 잡고 있던 상대는 어디로 갔나요?
 
집 안에 남은 건 맑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햇살, 그리고 당신뿐입니다.
 
권 백, SAN 체크
 
권 백:
SAN Roll
기준치: 65/32/13
굴림: 39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치 -1
 
마치 영화 속 장면이 빠르게 전환되듯, 페이드아웃 없이 한순간에 뒤바뀐 세상.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권 백:... (전환된 풍경을 머리가 따라가질 못하고 눈꺼풀을 두어번 깜빡이며 주위를 돌아봤다. 여전히 같은 장소에, 같은 옷차림. 변한 거라곤 쾌청해진 날씨와 감쪽같이 사라진 너. 마치 원래부터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주위가 자연스럽다. 나만이 그대로인 것 같은 이 상황이 이질적이게 조여온다. 굳이 눈으로 확인해야 이 답답함이 풀릴 것 같아 커튼을 걷고 베란다로 나가 내리쬐는 태양을 마주한다. 따스하다 못해 뜨거울 여름의 뙤약볕이 참으로 평화롭다. 꿈이었나? 베란다의 문을 닫고 들어와 목덜미를 매만졌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는 자연스레 손에 닿는 휴대전화를 무의식적으로 들어 화면을 보면, 그래, 네게 연락을 취해본다. 주소록을 켜고 '강서-^' 라고 적힌 네 이름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베란다에서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입니다.
 
작은 구름 몇 점이 동동 떠 있고, 햇살은 눈이 부시게 쏟아져 내립니다.
 
먹구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파로 돌아오는 동안 바닥을 살펴보면 서하에게서 뚝뚝 떨어지던 물마저 사라졌습니다.
 
당신의 심정을 알지도 못 하는 건지 티비에선 기상캐스터가 말간 목소리로 주간 날씨를 알려주는 중입니다.
 
맑음, 맑음, 그리고… 맑음.
 
장마철인데도 이렇게 맑은 날이 지속되는 건 드문 일이라고 합니다.
 
분명 전부 비였는데…
 
날짜나 시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기억하던 그때 그대로입니다.
 
휴대폰을 들어 서하에게 전화를 걸면 신호음만 한참 이어지더니, 전화를 받을 수 없어…로 시작하는 기계음이 울립니다.
 
몇 번을 다시 걸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습니다.
 
그 외의 다른 것을 살펴보아도 평범하고 익숙한 당신의 집일 뿐입니다.
 
창밖은 그늘마저 푸르러 바다를 베어 옮겨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매미 소리, 물감을 풀어둔 푸른 하늘, 건조한 여름.
 
꿈이라도 꾼 걸까요?
 
쏟아지는 햇살에 이처럼 눈이 따가운데도?
 
폭우도 서하도, 그리고 반짝이던 무늬마저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게 틀림없잖아요?
 
서하는 연락을 받지도 않으니, 내일 학교에서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분명 학교에서 만나자고 말했었죠.
 
대체 오늘 겪은 일이 무엇인지…
 
…멍한 정신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권 백:일단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액정 화면을 쳐다본다. 학교에서 만나자는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오늘이 학교에 가는 날이었던가, 날짜를 확인해보니 분명 개학 전 날이다. 그럼에도 가만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다.) ...아, (네게 빌려준 옷은 그대로일까. 그대로라면... 방금 것들은 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해프닝으로 그칠 수 있을 테다.)
 
옷장 문을 열어보면 서하에게 빌려주었던 옷이 제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서하에게 남아있던 물내음이나 서하의 체향따위는 한치도 묻어 있지 않습니다.
 
권 백:... (빌려줬던 옷가지가 그대로임을 보고 착잡한 마음으로 제자리에 내려놓는다.) ...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
...
(가만 누워 멀겋게 천장이나 바라보고 있으니 밀려드는 사고는 겹쳐지고 더해져서, 점차 거대하게 나를 압박해온다. 차라리 너 말고 다른 사람한테 연락이나 해서, 이 좋은 날에 놀러나 가자고 할 걸. 그렇게 떠올린 다른 사람의 형상에 검은 머리칼이 비친다. 숱해져버릴 감정에 움찔, 몸을 돌리고 등을 말았다.) 하아아... ...
거지같네.
(벌떡 일어나 겉옷 하나만 잽싸게 챙겨서 현관문까지 직행한다. 망설일 필요도 없이 문고리를 잡아 집밖으로 성큼, 발을 디딘다.)
 
백이 문을 열고 나오면 강렬한 햇빛이 백의 발치부터 찬란하게 내려옵니다.
 
저 쨍쨍한 햇살을 봐요.
 
겉옷을 입을 여유도 없겠네요.
 
권 백:윽..(쨍쨍한 햇살에 눈을 찌푸리곤, 다시 현관문만 벌컥 열어 겉옷을 던져놓고 학교로 향한다.)
 
백은 옷가지를 던져둔 채 학교로 향합니다.
 
학교로 가는 길은 이전과 같습니다.
 
매번 걷는 길, 항상 그 자리에 위치한 상가..
 
바닥에는 물웅덩이 하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학교는, 아직 방학이라는 걸 알려주듯 교문이 닫혀있습니다.
 
운동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소문 하나만 열려 있군요.
 
저 멀리서 경비원 아저씨가 다가와 "학생, 개학은 내일이야."라는 말을 합니다.
 
그 외에 학교로 별 다를 건 없어보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죠. 건물은 쉽게 변하는 곳이 아니니까요.
 
또 무얼 할까요?
 
권 백:... (못마땅한 표정이다. 역시나, 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일 줄이야. 차라리 눈으로 확인이라도 했으니 상대적으로 안심이다. 몇 번을 다시 걸어도, 문자를 남겨도 대답없는 네 소식을 몰라 답답해 나온 것 뿐이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어귀에, 방향을 틀어 네 집을 찾아간다. 염치를 생각할 때가 아니니까.)
 
백은 왔던 길을 돌아 돌아, 방향을 틀어서 서하의 집으로 향합니다.
 
주택이 즐비한 주택가, 그 중 다른 집보다 유달리 큰 집으로 찾아가 문 앞에 섭니다.
 
권 백:(거침없이 초인종을 눌러본다.)
 
그리고 초인종을 누르면..
 
띵동-.
 
...
 
...
 
...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걸까요?
 
띵동, 띵동, 띵동-
 
백은 거침없이 초인종을 누릅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는 집을 바라보는 찰나, 옆에서 한 아주머니가 누구냐며 말을 걸어옵니다.
 
아주머니:이 집 도련님 친구니?
 
권 백:(열린 문틈 사이로 집 안을 슬쩍 쳐다본다.) 아, 안녕하세요. 강서하 지금 있어요?
 
아주머니:어머, 친구가 온다는 말은 따로 없었는데.. 도련님은 지금 집에 없어.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나갔는지 아침부터 집에 없더구나.
공부라도 하러 간 게 아닐까 싶은데.. 그러고 보니 내일이 개학 아니니?
내일 보면 되겠는데. 혹시 급한 일이라도 있어서 그래?
 
권 백:아... 그래요? (집에도 없고, 여기까지 와서도 정확한 행방도 알 수가 없나. 잘 마무리 인사를 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
 
아주머니는 다음에 놀러 오라는 말과 함께 백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줍니다.
 
한바탕 걸었던 탓일까요? 집에 오니 땀이 제법 흐를 정도로 덥습니다.
 
후끈후끈하네요.
 
권 백:(집에 돌아가면 씻고 에어컨이나 틀고 있어야지. 점차 일상스러운 생각으로 들어찬다. 한 켠에는 짐덩이처럼 사라진 네 해방이 불안이나 걱정 따위를 한아름 안고 있었다.)
 
푸르른 하늘, 물기 하나 없는 건조한 시간.
 
백은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갑니다.
 
오늘도 하루를 보내면, 무사히 내일이 오겠지요.
 
적어도 이때까지의 백의 하루는 그랬으니까요.
 
파란빛이 진한 하늘은 어둠이 깔려도 맑디 맑기만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따라 유난히 별이 많아보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내일이면 드디어 개학이네요.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요.
 
♬ Letter
 
 
 
 
개학, 멀게만 느껴지던 단어가 오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펄럭이는 교복들이 나비처럼 이곳저곳 쏘아 다니네요.
 
어제 일어났던 일들이 생생한 꿈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일을 빼면 이 여름은 평범한 하루와 다를 것 하나 없어, 백은 어제보다 배로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 꿈이었을까요?
 
걸음은 느릿해집니다.
 
보통은 횡단보도를 건너, 가로등 두어 개를 지나면 서하가 보이곤 했습니다.
 
하지만…
 
“선배, 그거 들었어요? 오늘 정상수업이래요.”
 
백의 어깨에 자연스레 팔을 걸치는 건, 다름 아닌 다른 반 후배입니다.
 
서하는 보이지 않습니다.
 
후배 1:그보다 오늘 날씨 진짜 좋네요. 보통 이맘때 즈음이면 비도 오고 그랬던 것 같은데.
 
권 백:정상수업? (표정을 와락 구긴다. 다른 걸 떠나 개학식에 정상수업이라니. 무난하게 공부하기 싫은 학생들이 할 법한 생각이겠다.)
그래서 어제 비왔잖아. (그걸 까먹을 정도냐며 어깨를 툭치며 장난스레 비웃는 투로 웃는다.)
 
후배 1:?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요즘 계속 맑은 날씨만 이어지고 있잖아요.
어제도 비는커녕 말라 죽을 뻔 했다구요.
 
권 백:.엥? 어제 비 왔잖아? 그냥 비도 아니고 폭우였는데, (야, 그치? 옆을 지나가던 다른 학생을 붙잡고 제 말을 확인하듯 따져 물었다.)
 
후배 1:무슨 소리예요, 비 안 왔다니까? (덩달아 네가 붙잡은 학생에게 비 안 왔죠? 하는 물음을 던진다.)
 
백에게 붙잡힌 학생을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비가 안 왔다는 대답을 꺼내 놓습니다.
 
후배 1:봤죠? 선배, 혹시 잠 덜 깬 거 아니에요? 아무리 그대로 개학 날부터는~.. (장난기가 담긴 웃음을 실실 짓는다.)
 
권 백:(진짜 꿈이라도 꿨다는 건가. 의아스러움에 제 뒷목을 매만졌다.) 잠같은 소리하네, 자꾸 그러면 끌고가서 베개로 써버린다. (샐쭉 웃고는 이마에 손가락을 약하게 튕겼다.)
 
후배 1:악! (엄살을 피우며 요란한 손짓으로 이마를 벅벅 문지른다.) 어차피 반도 다르면서.. 선배야 2학년 교실에도 자주 오긴 하지만.. (문질문질)
 
권 백:엄살은- (키득 웃고는) ...야,
강서, 걔 왔냐?
 
후배 1:..? 강서..? 걔가 누구예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 누구지?
혹시 다른 반 애 말하는 거예요? 1학년?
 
권 백:...뭐야, 강서하 왜 걔 있잖아. 공부 존나 잘하고 장난도 못치는 애.
 
후배 1:..? 강서하..? (눈까지 돌려가며 고민하는 데에도 인상이 펴지질 않는다.)
모르겠는데요. 처음 들어요.
우리 반에 공부 존나 잘하는 애는 이희성인데.
다른 학교 애 이름이랑 헷갈린 거 아니에요? 역시 선배, 잠이 덜 깬-..
..아, 맞다. 동아리 보고서!
 
걸음을 멈춘 후배는, 뒤를 돌더니 왔던 길 위를 냅다 달리기 시작합니다.
 
무언갈 두고 온 모양이네요.
 
덩그러니 남겨진 백의 뺨 위로 푸른 나뭇잎 하나가 떨어집니다.
 
중력을 따라 떨어진 잎은 한가득 여름을 담아 푸르기만 합니다.
 
그리고…
 
권 백, 지능 판정
 
권 백:
지능
기준치: 55/27/11
굴림: 6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아까 그 후배는 서하와 친분이 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말 모르는 눈치였죠.
 
권 백:... 저게 왜 저런데... (얼빠진 표정으로 가는 뒷모습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깨고 나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러기를 바랐는데.)
 
의문도 잠시, 교문 앞 횡단보도입니다.
 
신호를 기다리며 건너기 전, 당신에게 전화 한 통이 도착하네요.
 
휴대폰이 가볍게 진동합니다.
 
화면을 보면 저장되지 않은, 처음 보는 번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권 백:..? (모르는 번호다. 보아하니 스팸이겠거니, 끊어버린다.)
 
백은 전화를 바로 끊어버립니다.
 
이 놈의 스팸 전화는 아침부터 부지런하기도 하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곧바로 다시 진동이 울립니다.
 
아까와 같은 번호군요.
 
끈질기다구요, 이 스팸 전화..!
 
권 백:... (벨소리만 들어도 매크로식 멘트가 줄줄 샐 게 분명한데. 끈질기니 한 번 받아나 본다. 역시 스팸에 먼저 말을 걸지는 않는다.)
 
전화를 받으면 준비된 멘트는 고사하고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휴대폰 너머로 옅은 숨소리가 들립니다.
 
한참을 얘기하지 않은 채, 그저 숨소리만이.
 
잘못 건 전화일까요?
 
강서하:…선배?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전화를 건 이는 서하입니다.
 
불안하고, 여유가 사라진 그 목소리는 볼품없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동시에 그가 낯설기도 합니다.
 
권 백:...강서하? (불안한 음색에 확신이 깃든다.)
강서, 너 지금 어디야? 어딘데 어제 하루 종일 전화도 안 받고... (집에도 없고, 오늘은 네 친구가 네가 누구냐고 말을 한다. 의문점을 토해내고 싶은 건 몇가지 되지 않는데, 불안한 건 수를 세기가 어려웠다.)
 
강서하:..아. (짧게 말하는 단어에조차 떨리는 기색이 묻어나온다. 그러고도 한참 말이 없다가, 더듬더듬 기억을 짚어나가듯이 말을 잇는다.) 먼저-.. 학교에 도착했어요. 알아볼 게 있어서요. ..도서실에 들리려고.
그런데 선배,
... 혹시, 제 이름.. ..기억나요?
 
권 백, 정신력 판정
 
권 백:
정신
기준치: 65/32/13
굴림: 65
판정결과: 보통 성공
 
당연한 걸 왜 묻는지 모르겠습니다.
 
방금도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자, 수화기 너머 상대에게 다시 한 번 말해줍시다.
 
권 백:(볼품없는 기세에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 깊숙이 누른다. 그렇게 고대하던 네 첫 질문은 맥이 빠질 만큼 어이가 없어서 하, 하고 탄식을 토해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말 같은 소리를 해, 강서하. 아까도 들었으면서 왜 그래? 그보다 학교라고?
 
강서하:아, 네. 학교예요. (무언가 행동이라도 취하는 건지 사락거리는 아주 작은 음이 울린다.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선배는요? 학교로 오고 있어요? 기억-..은 좀 어때요?
 
권 백:어, 가고 있어. 도서관? 거기 있을 거야? (불안감에 자꾸만 확인하게 된다.) ...기억...이라니. (아까부터 너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들만을 거듭한다.)
 
강서하:지금 당장은요. (그러다 문득, 다시 숨소리가 이어진다. 차분하게, 일정한 간격. 그러나 묘하게 당황이 섞여있는 듯한 호흡.) 설마 아직도 기억이 안 돌아온 거예요..?
... ... ... 하아-.. (손으로 연거푸 마른 세수를 했다. 무언가 복잡한 듯한 음성이었다. 평소라면, 웬만해선 꺼내지 않을 목소리.) ..안 되는데-.. 이러면-.. (네게 하는 말이 아닌 듯 중얼거리는 문장이 점차 잦아든다.)
 
보행자용 신호등 불이 초록색으로 바뀝니다.
 
횡단보도, 그 하얀 선을 따라 걸을 때 즈음 서하가 중얼거립니다.
 
매미가 우는 소리에 묻혀버릴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강서하:..저, 얼굴이 사라지는 중이에요.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요?
 
그러나 서하는 장난을 치는 기색이 아닙니다.
 
휴대폰 너머의 표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리곤 전화를 뚝, 바로 끊어버리네요.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일 텐데.
 
일상과 비일상 사이에 정신이 멍해집니다.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끼익-!
 
큰 소리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습니다.
 
당신의 눈앞, 가까운 거리를 두고 아슬하게 멈춘 차 옆으로 한 학생이 넘어져 있습니다.
 
부딪히진 않았지만, 모두가 웅성거리며 횡단보도 쪽을 쳐다보네요.
 
권 백, 관찰 판정
 
권 백: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63
판정결과: 실패
 
한 번 더, 관찰 판정
 
권 백: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3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운전자와 학생은 무어라 얘기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차로 시선을 옮기면…
 
바퀴가 없습니다.
 
잘못 본 걸까요?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그제야 바퀴가 보입니다.
 
소란도 잠시, 지각을 피하고자 모두 다시 학교로 걸음을 옮깁니다.
 
물론 당신도 그래야겠죠.
 
오늘 하루의 시작이 묘하고, 또 불안불안하게만 느껴지네요.
 
한층 한층 계단을 오르다 보면 백의 반이 가까워집니다.
 
오늘따라 파아란 창밖이 무섭게도 아름답습니다.
 
제 교실에 가기 전 정신을 고쳐잡고 서하를 찾으면,
 
다른 반 교실 속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서하만이 없는 게 아닙니다.
 
서하의 책상과 의자까지도 그림을 잘라 떼어놓은 듯 보이지 않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지나가는 [후배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눈치이며, 교탁에 붙은 [자리표]에는 학생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권 백:...뭐야, 이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다짜고짜 지나가는 후배 한 명의 어깨를 잡아 불러세우곤, 이 기이한 상황에 대해 물었다.)
 
지나가던 후배들은 방학 때 있던 일이나, 다른 학교보다 이른 개학에 대한 불만을 토하고 있습니다.
 
언제 도착했는지 등교 시간 때 만났던 후배가 백이의 손길에 뒤를 돌아봅니다.
 
후배 1:아까부터 계속 걔 얘기네. 걔가 누군데 그래요?
 
후배 2:처음 듣는 이름인데, 우리 반이야? 그런 애가 우리 학교에 있는 줄도 몰랐어.
 
후배 1:나도. …내가 걔랑 아는 사이였다고?
 
당신을 놀리는 기색이 아닙니다.
 
정말, 진지하게 서하의 반 아이들은 당황한 표정을 짓네요.
 
마치 벽을 두고 얘기하는 기분이라 백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다들 서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요?
 
권 백:... (포기하고 고개를 돌린다. 이 무슨 세상이 나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도 아니고... 행정시스템마저 배신할 일은 없겠지. 교탁으로 가 '강서하' 이 세 글자를 찾으려 혈안이다.)
 
교탁 위에 붙여진 자리표에는 학생들의 자리 위로 이름과 학번이 적혀있습니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활자를 짚어 살피면…
 
없습니다.
 
애초에 없던 학생처럼 서하의 자리도, 이름도, 학번도.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리표와 친구들의 얘기를 확인한 권 백, SAN 체크
 
권 백:
SAN Roll
기준치: 63/31/12
굴림: 3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성치 감소 없음
 
매미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울어댑니다.
 
하나, 둘, 셋.
 
당신에게 그리 속삭이던 서하는 어디로 간 건가요?
 
모두가 한 사람을 잊고 여름을 보내는 중입니다.
 
창밖의 [푸른 하늘]은 작위적으로 맑고, 나무 아래 그림자는 잠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매미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당신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권 백:(매미 우는 게 뭐 어떻다고 귓가를 따갑게 만드나, 귀찮게도 신경이 쓰인다.)
 
매미의 돌림노래는 끝날 기미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권 백, 듣기 판정
 
권 백: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92
판정결과: 실패
 
일정하게 반복되는 소리는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권 백:쯧, (창밖의 하늘을 향해 시선이 올라간다. 어지러운 상황 속에, 변치 않을 하늘이라도 보며 한숨 돌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구름 몇 점이 떠다니는 하늘은 지독하게도 푸릅니다.
 
권 백, 관찰 판정
 
권 백: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82
판정결과: 실패
 
바람이 불지 않기 때문일까요.
 
구름은 제자리에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않습니다.
 
띠리링-
 
힘차게 울리는 수업 종.
 
재잘거리던 아이들도 자리를 찾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권 백, 당신은 당신의 기억을 믿을 수 있나요?
 
모두가 그것이 거짓이라고 속삭여도?
 
얼른 자신의 반으로 돌아가면 선생님께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업을 시작합니다.
 
누군가의 부재는 애초에 없던 것처럼 하루가 흘러갑니다.
 
“예문에도 나와 있듯이 관계부사를 써야 하므로…”
 
“…에서, 그러므로 빈칸에 들어갈 말은.”
 
Where.
 
몇 아이들이 답합니다.
 
동시에 선생님께선 당신을 탐탁지 않게 쳐다보네요.
 
“백이가 오늘 영 집중을 못 하는 것 같네. 아까 말한 빈칸의 답, 한번 불러보렴.”
 
모두의 시선이 당신에게 쏠립니다.
 
흔들림 없는 올곧은 시선을 보자, 절로 속이 메스꺼워집니다.
 
권 백, 관찰 판정
 
권 백: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74
판정결과: 실패
 
그때, 복도 쪽 창가를 익숙한 인영이 스쳐 지나갑니다.
 
햇살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분명 서하를 닮은 이입니다.
 
“백아?”
 
선생님께선 벙긋하는 입으로 무어라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당신에게 중요한 것이었을까요?
 
서하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또 가득 채웁니다.
 
권 백:(수업이 지금 머리에 들어올 정신이 어디있겠어, 홀린 듯이 복도 창가에 고개가 돌아간다. 뜨여진 두 눈이 그를 붙잡으라 말한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대로 교실 뒷편을 돌아 문을 벌컥 열어제껴 교실 밖으로 빠져나간다.)
 
당황한 표정의 친구들을 지나쳐 복도로 향하면, 흔들리는 머리칼은 이미 계단을 오르고 있습니다.
 
위로, 그리고 다시 위로.
 
어느 교실에선 시를 읊는 소리가, 어느 교실에선 공식을 정의하는 소리가.
 
계단을 오르는 이는 당신과 서하뿐입니다.
 
서하는 뒤 한 번 돌지 않고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네요.
 
숨이 부족해집니다.
 
한참을 걷던 다리가 저릿해질 때 즈음, 당신은 활짝 열린 옥상 문을 보게 됩니다.
 
…서하가 이곳에 있을까요?
 
권 백:(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줄도 모르고 열린 옥상 문으로 보이는 푸름에 시선을 빼앗긴다. 기대와 불안 따위가 뒤섞인 원동력으로 계단을 밟는다.)
 
끼익-
 
문을 열고 옥상에 발을 딛자, 철조망 밖 너른 하늘을 보는 이가 그곳에 서 있습니다.
 
흩날리는 머리칼은 왼쪽에서, 다시 오른쪽에서.
 
바람의 방향은 초 단위로 달라지고, 하늘 위 구름은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않습니다.
 
펄럭이는 교복, 흔들리는 검은색 머리카락.
 
당신이 가까이 다가오자 서하는 천천히 뒤를 돕니다.
 
아, 그 얼굴은 분명….
 
강서하:..선배?
 
티 없이 맑은 검은 머리, 당신과 엇비슷하지만 조금 모자란 키, 흐트러짐 없이 단정히 입은 교복.
 
하지만, 얼굴은 지우개로 문댄 듯 보이지 않습니다.
 
흐릿하고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그 얼굴만은 알아볼 수 없습니다.
 
권 백, SAN 체크
 
권 백:
SAN Roll
기준치: 63/31/12
굴림: 4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치 감소 없음
 
당신에게, 그리고 서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블러 처리가 된 듯한 그 얼굴에 몸이 반사적으로 얼어붙습니다.
 
강서하:선배, 이상해요. 아무도 절 기억하지 못해요.
선배는 절 알고 있죠? 지금 제 얼굴, 보여요?
 
울먹이는 표정.
 
아니, 저걸 표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흐릿한 얼굴은 여전히 뿌옇기만 합니다.
 
…눈은 어떤 색이었고, 어떤 모양이었고, 또 어디에 자리 잡고 있던지.
 
백마저 그 얼굴을 떠올리기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당신이 가진, 서하에 관한 기억들 역시 하나둘씩 지워지는 중이란 것을요.
 
강서하:…보이지 않는군요.
 
손을 뻗으려던 서하는 그대로 굳어 당신을 마주 봅니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지만, 당신은 분명 그리 느꼈습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요동칩니다.
 
가는 침묵이 흐른 후 서하는 백을 와락 끌어안습니다.
 
쿵, 쿵.
 
엇박자로 뛰는 심장 박동 소리.
 
강서하:(등 뒤로 모여든 손이 네 옷자락을 세게 움켜진다. 꼭 무서운 것을 본 어린 아이처럼, 두려움에 좇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처럼 네 품 속으로 파고들려 할 뿐이었다.)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치만 무서워서-. (손에 힘을 줄수록 떨림이 더해진다. 너를 끌어안은 몸에도 미세한 떨림이 진동하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알까.)
 
권 백:(허술하게 들떠버린 팔이 네 몸에 쉬이 닿지 못하고 허공에 걸려있다. 애달프게 뻗은 손아귀 사이로 너를 기억했던 모든 것들이 무저갱 속으로 하나 둘 잊혀져간다. 어느 무엇도 예외는 없었다. 개중에는 나 역시 포함되어있었다. 기억들이 소중하다는 강렬한 인상만이 머릿 속을 꽉 메워, 더이상은 빠져나가지 못하게 붙잡고만 싶었다. 그 생각 뿐이었다. 오로지 네 이름 석 자를 닳도록 빈 틈없이 휘갈기며 너를 마주 안는다. 미안하고 무서운 건 너만이 아니다. 극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는 생각이 일치했다.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다.) ...강서하, 아냐, 나 너 기억해. 괜찮아. ... 괜찮아... (그러니까 제발 흔들리지 좀 마. 금방이라도 이러다 사라질 것처럼 굴지 말란 말이다. 우악스럽게 껴안은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강서하:선배, 선배-.. (그게 마치 그리운 사람의 이름이라도 되는 것처럼.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어 너를 불러댔다. 미안하다면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고 있는데,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네게서 떨어진다면, 정말로 혼자 남겨질 것만 같아 네가 밀쳐버린대도 너를 안고 싶었다. 매달려서 펑펑 울고 싶었다. 그런 욕심에 마주한 네 힘있는 포옹이 어찌나 반가운지. 꾹 쥔 손을 풀었다가 놓칠세라 다시 너를 껴안았다. 푸른 하늘, 한여름의 낮. 더운 기온은 와닿지도 않았다. 느껴지는 것이라곤 오로지 제 두려운 감정, 든든하면서도 놓칠까봐 두려운 너의 몸, 벗어나고 싶지 않은 너의 품.)
선배, 정말 절 기억해요? (미안하지만, 이번엔 네가 그만 물어보라 해도 못 멈출 것 같아.) 저 안 잊어버렸어요? 선배-..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이 꿈이길 빈 적이 몇 번이었더라. 지금만큼 간절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제 이름, 다시 불러주면 안 돼요? 하, 한 번만-.. 딱 한 번만이요.
 
권 백:전부 기억해. (너를 보지 않는 시선처리는 처참할 지경이었다. 껴안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상황이다. 전하지 못한 것들은 내 추억 속에 쌓여 있는데 물거품이 되어 녹아흘러, 신경을 조금이라도 거두어드리면 그 사이에 하나를 더 잃을까, 품에 안은 너를 잊는 걸까, 아니면 잃는 걸까. 붙잡기에 가까울 포옹이 애처롭기만 하다. 기억하지 못했음에도 기억한다 말해야만 한다. 나마저도 약한 모습을 내비쳐 괴로워하는 네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괴로울 테니까, 그것을 설령 잊는다 하더라도.) 강서하 맞잖아, ... 강서하, ... 서하야. (끌어안을수록 가까워졌다. 빈틈이라는 건 안을 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껴안으니 네 어깨를 강하게 그러쥐고 설익은 뺨을 네 머리에 부볐다. 이대로 우리마저 녹아버리면, 나는 너를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강서하:... ... ... (네게서 불린 이름이 신호라도 되듯 마음이 울렁거린다. 울컥이며 뛰쳐나오려는 감정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몰라도 무작정 참고 만다. 이러다 울음이라도 터트려버리면 안 될 테니까. 선배, 라고 다시금 너를 부르는 것마저 꾹 참아버리고 그저 틈도 없는 너에게 파고드기를 반복한다. 담뿍 껴안은 저희, 숨결마저 뒤섞일 거리, 얼굴을 파묻은 목덜이에서 느껴지는 너의 감촉과 체향. 잊고 싶지 않다 항의라도 하듯 몇 번이고 숨을 들이켰다 내쉬면, 익숙한 내음에 그제서야 안정이라도 찾은 양 서서히 호흡이 가라앉는다. 눈까지 감고 그 안락함에 잠시 모든 것을 맡겨두었다가, 떨어지기 싫어 고개를 네 어깨 위로 몇 번 부빗거리고는 서서히 몸을 떨어뜨려 놓는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서하는 진정한 듯 천천히 당신에게서 떨어집니다.
 
강서하:... 차원의 관문도 사용할 수 없어요. 마치 이 세계에 갇힌 것만 같아.
 
차원의 관문?
 
그리 말하는 서하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습니다.
 
강서하:…아직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
저흰 원래 세계에서 신도들에게 쫓기는 중이었어요. 도망치던 중 차원의 관문을 사용했지만, 그대로 우주 미아가 되었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속 차원을 넘었었잖아요.
다른 세계로 떨어지는 과정에서 가끔 기억을 잃기도 했는데…
 
…우리가?
 
서하의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영화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제물과 차원의 관문, 우주 미아와 다른 세계.
 
동시에, 기이하게도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우주를 건너, 먼 은하를 건너, 다른 세계로 함께. 마치 당신이 겪은 일처럼.
 
모든 것을 떠올린 권 백, SAN 체크
 
권 백:
SAN Roll
기준치: 63/31/12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치 감소 없음.
 
비가 멈추는 것은 주문진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비가 쏟아지던 그 여름도, 맑고 화창한 이 여름도.
 
모두 우리의 진짜 여름이 아닙니다.
 
우린 원래 세계를 찾아 한없이 우주를 넘나들었죠.
 
그 과정 중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여름인데도 선선했던 어느 세계, 잘못된 위치에 떨어져 바다에 빠졌던 우리, 겨울 별자리가 보이던 또 다른 세계.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집을 찾아서, 다음 세계로.
 
그렇다면 왜, 이번 평행세계에서 서하는… 사라지는 중인 걸까요?
 
서하의 존재 자체가 없었던 세계 또한 이번이 처음입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강서하:이 세계는 확실하게 다른 곳들과 달라요. 다들 절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유는 모르지만, 전 사라지는 중이고.
…선배, 선배도 역시 절 잊을지도 몰라요.
 
흐르지 않는 몽글한 구름이 그림자를 만들어내면, 우리가 선 곳의 짙은 파랑이 가려집니다.
 
서하는 천천히 철조망에 기대앉아 당신에게 작은 수첩과 연필을 건넵니다.
 
당신을 위해 옆자리를 가볍게 쓸어내리는 그 손은, 미약하게 떨리는 그 손은, 서하의 얼굴처럼 흐려지고 형태를 잃고 있습니다.
 
이건 잊지 않기 위한 기록입니다.
 
강서하:적어두면 더 기억하기 쉬울 거예요. 잊지도 않을 거고.
 
그저 희망 사항일지라도.
 
강서하:그때 기억나요? 우리가-..
..음. 안.. 앉을 거예요..? (표정 하나 보이지 않으나 올라간 고개가, 널 보고 있는 듯 했다.)
 
권 백:...앉아야지. (홀린 듯 네 옆에 붙어 자리에 앉는다. 수첩과 연필, 후에 다시 본다하여도, 남 이야기처럼 받아들인 소설에 불과해질 글자들. 의미없는 행동일 것임을 은연 중에 알았으나 묵묵히 받들어 엉성하게 연필을 쥔다. 무엇 하나 적어내리기 어려울 것 같다. 남은 파편이라도 끌어모아 써내려버리면 그마저도 완전히 잊을 것 같았기에.)
 
강서하:(네가 옆자리에 앉는 것을 끝까지 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고갤 돌린다. 그럼에도 계속 곁눈질로 널 보고 있는 것은 드러나지 않았고. 혹시라도 놓칠까봐 무섭다는 생각이 아무리 진정하고 또 진정해도 들어서, 잡고 싶은 네 손 대신 제 손이나 꾹 잡아 주먹을 쥔다.) ..음. 뭐부터 얘기하는 게 좋을까요. 이런 걸 해본 적이 없어서-.. (기껏해야 학기 초에 자기 소개하던 게 전부가 아니던가. 그 기억을 토대 삼아 더듬더듬, 말을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어-.. ..제 이름은 강서하, 이고 나이는 18살.. 남자예요. 보다시피. ... (안 보이나? 흘리듯 중얼거리며 희미해진 제 손을 바라보았다.)
...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의미없는 짓이다.) ..학교는 선배랑 같은 하해 남고예요. 동아리는 연구부에 들었고, 어떤 선배는 3학년이 되면 저 보고 부장을 맡아보라 하지만 사실 저는 아직까지 생각이 없어요.
... 좋아하는 건-.. ... (막막해졌다. 좋아하는 것에도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다. 평소에는 이게 별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에 마주하니까 괜히 더 신경에 거슬린다.) ..실험하는 거랑 공부, 그 중에서도 생물을 좋아해요. 가끔 운동하는 것도 좋아하고, ..가족도 좋아요.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 ... ... 선배도 좋아해요. (이건 맞는 말이니까.)
..아. 너무 빨라요, 혹시? (네가 잘 받아적고 있을까, 고갤 돌려 네 쪽을 본다.)
 
권 백:(들리는대로 펜을 움직인다. 이름은 뭐고 나이는 몇이며 하는 일은 뭔지. 받아쓰기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너를 기억하는 건 아마 이 서툴고 삐뚠 활자 몇 줄이 전부가 된다. 너를 추억하는 건 과거가 전부가 된다.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며 실험과 공부를 좋아하는 너. 백지에 파편을 새길수록 밀려드는 추억이 하나, 둘, 뇌리 속에 부유한다. 처음으로 네게 말을 걸었던 때나 싫다는 너를 억지로 데리고 놀았던 기억, 유독 가치관에 어긋날 행동을 하면 놀라던 모습 등. 기나긴 간극과 함께 손이 멈춘다. 멈춘 채로, 가만히 기다렸다. 좋아하는 것들을 적어내려갔다. 마지막에는 내 이름이 붙었다. 고심한 끝에 적지 않아야 할 것을 적었다.) ... 아니. (시선이 제 뺨에 늘어붙었음을 알았지만 돌아보지 못했다.) ... 싫어하는 건.
 
강서하:(다행이다. 잘 적어주고 있구나. 수첩 위에 무언가 써내려져 가는 것만으로 그저 만족하기로 했다. 제가 말한 것이 적혀있든, 다른 낙서가 적혀있든, 그저 시늉을 해주는 것만으로-..) ... 싫어하는 건-.. ..모르겠어요. 시끄럽고 어수선한 환경? 사람들 시선이 너무 지나치게 쏠리는 것도 부담스럽고-..
... 음악 수업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러고 잠시 고민하다가, 머뭇거리며 뒷말을 꺼냈다.) ..노래하라고 시키면, 부끄러워서-.. (얼마 없는 손을 꼼지락거린다. 이런 건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이런 때가 되니 말이 나오긴 하는구나. 그걸 듣고 있는 이가 너라는 게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 (또 뭘 말해야지, 고민하는 시간이 늘었다. 혼자서만 이렇게 주절거리는 것은 짧은 생 중에서 거의 처음 있는 일과 마찬가지였다.) ... 꿈-.. ..꿈은 의사인데, 아마 아버지가 의사셔서 그런 것 같아요. 엄청 간절하게 되고 싶은 건 아닌데, 그래도 그냥 그렇게 되어야 할 것만 같아요.
... 저 운동도 해요. 선배한텐 말한 적 없는데. ..몰랐죠?
 
권 백:(시시콜콜한 것들을 죄다 내리적는다. 하나를 적을 때마다 그 하나하나에 의문이나 추억을 되새긴다. 네가 싫어할 법한 것들은 모두 내가 잘하는 짓들이었다. 눈동자를 위로 올리면 네가 좋아하는 것에는 내 이름 두 글자가 적혀있었다. 가슴언저리가 간질거리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괴롭기만 할 뿐이다.) ... 나는 왜 좋아해? (운동이라는 단어를 적고 찍은 마침표에서 펜촉이 떨어지질 않는다. 멀거니 떨어뜨린 시선 끝에는 내 이름만이 선명히 눈에 비쳐졌다.)
 
강서하:(대회에 나가서 몇 번 상을 탄 것도 말해야 하나? 잘난 척 하는 것 같이 보이려나. 사라질지도 모르는 마당에 가릴 처지는 아닌가. 시덥잖은 생각에 빠져있기도 잠시, 정적을 깨는 목소리에 너를 돌아봤다.) 네?
(표정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분명 멍한 낯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얼빠진 느낌이려나. 제 표정을 들여다본 적이 적어서 잘 모르겠다.) 어-.. ... ... 그..냥..? ... 좋아요, 그냥. (네가 그렇게 다가왔는데. 내가 너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 와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명명할 수 있겠어.) 무슨 이유를 가지고-.. 사람을 좋아해본 적은, ... 없어서.. (그렇지만.) ... 좋아요, 선배가..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은, 나락같은 희망이 될까봐 꾹 눌러 참았다.)
아마 선배와 같은 이유가 아닐까요? (네가 평범히 친구를 사귀고, 저를 네 곁에 둬주는 것처럼. 저도 아마 그럴 것임을 명시하는 문장이었다. 물론 감정의 깊이를 따지자면 지금에서는 제가 너보다 깊을 것 같지만.)
 
권 백:... ... ... 같은 이유... 아닌데. (한동안 아랫입술을 물고 있던 입술이 간신히 떨어져 미약한 소리를 낸다. 어떤 형태의 미소이건 표정에는 일말의 행복이라곤 담겨있지 못했다. 집착적으로 이름에 눈이 빼앗긴 채 한숨을 쉰다.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숨겨야 했기에 곧바로 먹먹한 숨을 버겁게 집어삼킨다. 마침표가 제대로 찍히지 못하고 선이 아래로 직, 그인다.) 나는 너처럼 그냥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고갤 들어 똑바로 마주한 표정은 곧장이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이 힘겨웠다. 그런 제가 꼴사나울 것을 알아도, 이런 순간마저 기억 속에서 날아가버리지 않을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네가,. 강서하 네가 사라질 거래. 괜히 좋아해서... 괜히 마음에 들어서는 씨발... 나는 어쩌라고? 이대로 잊으니까 괜찮을 줄 알아? (미세하던 진동이 점차 물기를 머금고 커져갔다. 맥박이 거칠게 뛰고 있음을 나는 감지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울컥 차올라버렸던 탓에 고개를 돌려 양 손바닥으로 제 눈을 눌러버리고 무릎에 팔꿈치를 찍어눌렀다.) ...네가 잘하는 거 하나 알려줄까, 이게 마지막이면 웃고나 있던가. 왜 죽을상이나 지으면서 사람 힘들게 하는데, 곧 죽게 될 거니까 속이 편하지. ... ... 강서하 너 존나 짜증나... 하필이면 왜 나야, ... 왜 하필이면 나인 거냐고... (목 놓아 울 수가 없어서 손바닥을 새로 흐르는 눈물에 잉크 자국이 번졌다. 기껏 받아적었는데, 무엇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네게 마음을 주지 말 걸. 잊혀져가는 네가 좋다. 잊혀지고 있음에도 네가 좋았다. 이런 내가 죽을 만큼 미웠다.)
 
강서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아 말을 토해낼 수가 없었다.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는 기억, 사라진 얼굴, 희미해지는 몸. 이렇게 점점 사라지고 말 거면, 속에 있는 제 심장도 응당 그래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너의 말에 저혼자 쿵 떨어져서는, 나 여기 살아있다고 존재를 피력하는 마냥 혼자서 날뛰고 있는 건지. 낮으면서도 강하게 울려오는 고동 소리에 속이 헤집어지고 울렁이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제 눈에는 너밖에 들어오지 않아서. 이렇게 무거운 숨을 쉬고 저보다도 먼저 가라앉아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너밖에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아서, 심히 동요하는 무지의 표정으로 너를 바라본다. 어째서? 사라지는 것은 저인데, ..어째서?) ... 선배. 선배-.. (저도 모르게 뻗어나간 손이 네 몸에 닿고서야 위치를 깨닫는다. 이런 손으로 너를 잡으면 싫어하진 않을까. 흉물스러워 하진 않을까. 너와 함께 있을 때면 유독 부정적이게만 드는 생각이 여실히 떠오른다. 그래도, 진작에 손을 거두었을 제 평소와는 달리 지금은 네가 더 신경쓰여서. 그대로 손을 옮겨 너를 감싸안듯 네 몸을 짚었다. 약하게 굽은 등에 하나, 무릎 위에 올려둔 팔에 하나. 분명 닿는 느낌이 나는데도 닿는 것 같지가 않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쩐지 눈시울이 화끈거려 오는 것만 같다.) ..선배. ... ... ... 미안, 해요. ... 미안해요-.. ... 미안해요... (보이지 않는 눈물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대로 증발해버리고 만다. 제가 당장에 해줄 수 있는 말은 그토록 네가 싫어하는 말뿐이라서.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로 제 탓인 것만 같아서. 네가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아서. 네가 나 때문에 아픈 것만 같아서. 그렇게 사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잖아. 정말로 내가 사라지는 거면, 이게 우리의 마지막인 거잖아. 사라질 네 기억에서 존재할, 마지막 모습인 거잖아. 그 순간마저 후회하고 싶진 않아서. 설령 네 입에서 제가 싫다는 말이 나오더라도 놓치고 싶진 않아서, 이를 악 물고 욕심을 부렸다. 그대로 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상하게 설레던 그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물기를 머금어 담뿍 먹먹해진 목소리. 바닥에 떨어지는 굵은 눈물 방울들이 다른 것들보다 빠르게 사라지고 만다.) ... 저라고,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사라질 수도 있다는데, 잊혀질 수도 있다는데, 집에-, ..돌아가지도 못 하고 이대로 없어질 수도 있다는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 잊혀지고 싶지 않아요. (꺼내오는 음성에 점점 울음이 섞여들어 간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선배한테서마저, 잊혀지고 싶지 않아요.. ... 이렇게 슬픈데, ... 웃고 싶지, ..않아요.
... 선배는 저, 왜 좋아해요? ... 이렇게 선배 짜증나게만 하는데-.. ..저 왜 좋아해요? 왜 계속 반에 찾아왔어요? 왜 저 데리고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었어요? 왜 계속 손을 잡아요. 왜 계속 볼에 뽀뽀하는 건데요. 왜 계속 그렇게 금방 사라질 것처럼 화를 내놓고, 저를 좋아해주는 건데요-.. ... 그 날 왜, ... 저한테 입 맞추고, ..그렇게 가버렸어요..? (그래서 왜 나를 이렇게, 자꾸만 헷갈리게 만들어.)
 
권 백:(그러고보면 우리는 서로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하는 것 같다. 미안하다는 말도 알고, 내가 지금 네게서 듣고 싶었던 건 그딴 사과가 아닌데. 남 앞에서 우는 모습 보이기 싫어하는 날 어지간히 알 것 같으면서 방금까지 너를 좋아한다는 내 말은 무시하는 건지, 자꾸만 네가 뱉는 약한 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다 못해 찢어지게 만들어. 네게서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게 이런 거야. 나는 말같잖은 소릴 지껄이면, 너는 눈치도 없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그래서 우리는 맞물리지 못하고 늘 빗겨나간다. 초지일관, 전과 변한 것 하나없는 게 이딴 것이라는 사실이 우릴 비참하게만 만들어. 네가 괜찮지 않은 것을 알아. 네가 어떤 심정일지 전부 짐작이 가. 차라리 죽는 게 낫잖아. 잊혀지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나을 거야. 타고난 성정이라는 게 그렇다는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웃지 못할 거야. 그런데도 널 아프게 할 말들만 늘어놓는 건 왜인 줄 알아? 전부 알면서도 너를 이해해주긴 커녕 모진 말만 나오는 건 쓸데없는 내 의구심 따위를 네가 짓밟지 못해서 그래.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원하는 답이 듣고 싶어서 그 한 줄기를 손에서 놓을 생각을 않았다. 이기적인 새끼라 그래, 이기적이라.)
 
(빗발치는 물음이 심장을 찌르고 가시가 박혔다. 고장이 난 수도꼭지는 물을 토해내기만 했다. 이렇게 된 거, 몸 속 수분이 다 날아가버릴 때까지 토해냈으면 한다.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완전히 잊기 전에 너를 내 안에 간직할 수 있을테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넌 나의 이런 결말을 바라지 않을테니까. 쏟아진 화에도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이유를 하나 먼저 구사해보자면, 그래, 식상하게도 처음은 호기심이었다. 라는 말을 꺼내어주겠다.)
 
내가 착각해서 그래. 멋대로 좋아한다고 착각해서. 강서 네가 나랑은 다른 사람이라서.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것 같으면서 나 챙겨주는 거 하나 머저리 같아 보였는데, 그게 뭐가 좋다고 들떠버렸어. (진짜 병신은 나였는데.)
 
 
권 백:난 변해가는데, 너는 그대로였잖아. ... 너는 왜 나 안 좋아해?
 
나는 네가 눈에 밟혀서 미치겠는데, 너는 항상 그대로였잖아.
 
매일 똑같이 인사하면, 나만 더 괴로워질 게 눈에 보이는데, 병신같이 네 옆에 있고 싶겠냐?
 
 
권 백:(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어느덧 너를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강서하:(겨우 떠낸 시야가 뿌옇다. 이게 흘린 눈물 탓인지, 아니면 시각마저 사라지고 있어서인질 모르겠다. 그래도 기왕이면 전자였으면 한다. 그래야 내가 너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너를 마주 보고, 네가 어떤 표정인지 보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제 기억 속에 담아둘 테니까.)
... ... ... (천천히 고갤 들어 너를 바라보았다. 잘게 떨리는 입술, 울음을 가득 담고서도 불안한 눈, 그럼에도 네게서 떨어질 생각을 못 하는 초점. 이 모든 것을 네가 보지 못하리라 생각하니까, 다행이라기보단 비참했다. 이런 얼굴을, 네가 싫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버린 것 역시, 비참했다.)
... 선배. (여전히 물기가 어린 목소리. 이제와서까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네 말대로 눈치도 없고, 뭐든지 캐묻고야마는 성격이라서. 그래, 이 빌어먹을 성정에 의거하자면, 그러고만 마는 사람이라서. 결국 입에 담고야 말았다. 눈물에 젖어 눅눅한 주제에 담담한 목소리.)
... 저, ..좋아해요?
(내가 방금 말한, 평범한 이유말고. 이제는 네가 눈치챌 차례야.)
 
권 백:(보이지 않는 얼굴이 그게 네 얼굴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당장에 눈에 새겨지는 건 무(無)였으니, 뇌는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야 만다. 네 얼굴이 생각이 나질 않는다. 몇 번이고 닿았던 그 얼굴이, 늘 고요하기만 했던 그 얼굴이 떠오르질 않는다. 답답함에 질식되어버릴 것만 같아 숨쉬기가 어려웠다. 와중에 네가 넌지시 꺼낸 질문은 내 예상에서 빗나가질 않는다. 그런 점이 비참할 만큼 싫었다. 그런 점이 나와 달라서 끌렸다. 그런 네 어깨를 붙잡은 양 손에 힘이 잔뜩 실렸다. 나는 절벽 끝에 서있었다.)
 
그딴 것도... 지금 말이라고 지껄이냐? 아까부터 내가 꺼낸 말들이 뭔지, 그렇게도 눈치가 없어?
 
좋아한다잖아. 네가 씨발, 마음에 들어서 지금 여기까지 와준 거잖아! (뺨이라도 한 대 치면 후련할까, 그에 맞아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보면 역시나 아파올 걸 알았다. 내가 말이다.)
 
강서하:... (속절없이 흘러가던 시간이 멈춘다. 지금은 무슨 마음을 느끼냐 하면, 모르겠다. 아까까지 강하게 울리던 심장 소리마저 뚝 멈춰버려서,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를 것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아도.. 본인이 가장 잘 알지 않나요?' 머릿 속에 울리는 말에 대답한다. 아니요, 선배. 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 ... ... 그럼. (네게로 뻗는 팔이 딱딱하게 굳어 제대로 나아가질 않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 양손으로 네 뺨을 감싸잡았다. 저와는 다른 얼굴이다. 다른 모양새, 다른 색, 다른 선.. 오로지 너로만 이루어져 있는, 너만의, ..그냥 너.)
... ... ... ..키스해도 돼요? (다만, 이 사람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진다면. 나는 정말 이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요? 내 일상에 이변을 만들어주고, 수없이 마음을 헷갈리게 만들고, 울렁거리는 속이 메스껍다가도 자꾸만 떨리게 만들고, 계속 생각나게끔 만드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게 하는 사람.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거예요?)
 
권 백:(한껏 쏟아내면서도 네게서 무슨 답이 나올지 몰라 소리치기만을 했다. 약한 소릴 자아내면, 거절되었을 때 돌아올 상처가 너무나 아릴 걸 알았다. 때문에 드센 발화 속에서라도 감출 수 있어야했다.)
 
(낯선 손길이 축축해진 뺨에 닿는다. 눈 앞의 너는 보이지 않는다. 또다시 얼빠지고 답답한 되물음에 성을 내버릴까. 이것이 영영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았다. 이마저 너를 헷갈리게 만들면 안됐다. 지나간 시간이 고까웠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반복하지 않기로 굳어졌다. 이미 잔뜩 젖어버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줄기라는 개념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목소리가 너를 향해 가볍게 부유한다. 웃지 않았으나, 나는 웃었다.) ... 해도 돼.
 
강서하:... ... (귓가에 네 목소리가 울린다. 얌전히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아 그 짧은 한 마디를 계속 붙잡아두었다. 그 다음 말은 필요하지가 않았다. 분명 저와 다른 얼굴인데도, 저와 같이 눈물 자욱으로 흐트러진 네 낯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러나 곧 기다리는 시간마저 아까워져, 서서히 네게로 고개를 옮겼다. 우리의 첫 입맞춤처럼 내가 너를 조금이라도 설레게 할 수 있을진 몰라도, 마음만은 진지하니 된 게 아닐까. 가늘게 감기는 눈, 서서히 돌아가는 고개. 숨결이 뒤엉킬 자리까지 다다르면, 기어코 눈을 감고 네 입술 위로 입을 맞추었다. 정말로 이게 내 마지막이라면, ... 이 순간 그대로 모든 것이 멈춰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너와 영원히 함께 있는 기분이라도 간직할 수 있을 테니까.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갈 수 있을 테니까. ... 좋아하는 너와, 함께니까.)
 
취미, 좋아하는 것, 당신과의 관계나 일화, 우리가 함께했던 아린 추억들.
 
기억해달라는 말과 함께 적었던 정보가 무심하게 구겨지고, 맞춘 입을 떨어뜨려 서로를 바라볼 때 즈음, 서하의 목소리마저 뭉툭해져 알아들을 수 없게 됩니다.
 
서하는 백의 어깨 위로 툭, 힘없이 머리를 기대네요.
 
그 무게마저 낯섭니다.
 
흐릿해지는 기억을 애써 붙잡아도,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기만 합니다.
 
강서하:... 다시 만날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절 잊지 말아주세요.
… 선배. 마지막으로 한 번만-.. … 제 이름을 불러주면 안 돼요?
 
권 백:(만족스러울 입맞춤에 처음으로 눈을 지그시 감았던 것 같다. 음미할 여유없이, 오로지 너라는 존재를 느끼기 위한 완성된 입맞춤.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내 어깨에 머릴 두었다. 어깨를 누르는 무게가 생생히 전해졌다. 안심스러워서, 불안이 멈추질 않았다.) ... (주억거리지조차 못하는 고개가 가만히 너를 응시했다.) ... 강서하.
 
계속, 다시.
 
불안하게 떨리는 그 목소리.
 
서하는 자신의 이름을 한참 동안 불러달라고 속삭입니다.
 
강서하:...기억해 주세요.
 
그 이름 역시 떠올리기 힘들어질 때면, □□□는 천천히 눈을 감습니다.
 
흰 물감을 군데군데 풀어둔 하늘 아래, 한 사람의 그림자가 서서히 지워집니다.
 
기대어 느껴지던 무게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 □□□, □□□…
 
우린 차원을 넘기 전, 집으로 돌아가길 빌며 속삭이곤 했죠.
 
이렇게, 지금처럼.
 
하나,
 
둘,
 
셋.
 
 
깜빡.
 
 
 
 
여름은 맑으매 푸른 하늘은 눈이 부십니다.
 
무더운 여름은 습하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립니다.
 
데자뷔처럼 옥상에는 당신만이 홀로 남아있습니다.
 
권 백, SAN 체크
 
권 백:
SAN Roll
기준치: 63/31/12
굴림: 97
판정결과: 실패
 
이성치 -1 감소.
 
손에는 힘껏 구겨진 수첩, 급하게 휘갈겨 쓴 티가 역력한 글이 남아있네요.
 
가장 크게 □□□에 대한 정보라고 적혀있으며, 그 아래로는 누군가의 사소한 정보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 □□□, □□□…
 
절대 잊어선 안 될 이름인데도 왜 이렇게 기억이 흐릿한지.
 
이젠 여름이 원망스럽게 느껴집니다.
 
□□□를 되찾고, 이 세계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오로지 당신의 힘으로만, 홀로.
 
한참을 되뇐다고 하여 방법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철조망에 오래 기댄 탓에 몸이 찌뿌둥하기도 하네요.
 
툭, 백이 움직이자 가벼운 종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권 백:(소리에 반응해 떨어진 종이를 봅니다.)
 
작은 쪽지를 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보입니다.
 
840.01이12꽃 / 도서실
 
혹시 몰라 남겨뒀어요.
 
권 백, 지능 판정
 
권 백:
지능
기준치: 55/27/11
굴림: 93
판정결과: 실패
 
휘갈겨 쓴 탓에 더 알아보기 힘듭니다.
 
숫자는 뭐고, 또 그사이의 글은 뭔지…
 
좀 더 보면 생각이 날 것도 같은데.
 
권 백, 지능 판정
 
권 백:
지능
기준치: 55/27/11
굴림: 40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암호 같은 글을 한참 바라보던 당신은 뒤늦게 깨닫습니다.
 
이건 도서실 창구번호를 표기한 것 같네요.
 
띠리링-
 
..그사이에 수업 하나를 완전히 빠진 것 같습니다.
 
잠시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든 것도 같으나-..
 
아니, 생각해보면 이곳은 진짜 세계가 아니므로 상관없는 일이죠.
 
어쨌든 쉬는 시간입니다.
 
이름도, 성격도, 함께한 추억도, 그 모든 게 조각난 사람이 마지막으로 한 부탁만이 남은.
 
권 백, 정신력 판정
 
권 백:
정신
기준치: 65/32/13
굴림: 10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를 오롯이 기억하는 건 당신뿐입니다.
 
도서실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요?
 
권 백:(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이 실렸다. 덕분에 종이는 완전히 구겨졌지만. 오늘 아침 도서실에 갈 생각이라더니, 뭔가 남겨뒀었구나. 아직 네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고 나니 발이 움직여졌다. 급한 마음에 걷던 발걸음이 점차 박차를 가하고 뛰는 모양새가 되어 도서실까지 가쁘게 달리기 시작했다.)
 
답답한 마음에 괜히 발걸음이 빨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릿속은 어지럽고, 울렁거리는 속은 이 계절을 완전히 받아내지 못합니다.
 
그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웃었던가요?
 
이 평화로운 세계를 떠날 정도로, 그 아이는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인가요?
 
구겨진 수첩에는 옅은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도서실에 도착하면 [종교], [예술], [언어]가 적힌 책장들이 빼곡합니다.
 
사서 선생님께선 보이지 않네요.
 
권 백:(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책장을 돌아본다. 느낌상 꽃과 관련된 카테고리를 봤어야 할 것 같았는데, 죄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 뿐이다. 무슨 다른 수가 있겠나, 샅샅이 뒤져보는 게 최선이었다. 종교관련 책장 앞에 서서는 책장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200번대 책들로, 다양한 종교에 관한 책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권 백, 자료조사 판정
 
권 백:
자료조사
기준치: 60/30/12
굴림: 9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백은 책을 살펴보다가 ‘종교, 혹은 미신 이야기’라는 책을 발견합니다.
 
꺼내어 살펴보자면..
 
권 백:(도통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지만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찾는 책은 이게 아닌 것 같아 유심히 보던 와중에 다시 책장에 책을 꽂아두고 예술 칸으로 넘아가 책을 살피기 시작했다.)
 
600번대 책들로, 다양한 예술에 관한 책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권 백, 자료조사 판정
 
권 백:
자료조사
기준치: 60/30/12
굴림: 93
판정결과: 실패
 
백은 책을 찾던 도중 문득 □□□에 관한 기억이 조금 더 흐려짐을 느낍니다.
 
아무래도 수첩을 한 번 봐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권 백, 다시 자료조사 판정
 
권 백:
자료조사
기준치: 60/30/12
굴림: 2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백은 책들 사이에서 ‘고대 예술과 발전’이라는 제목을 가진 채을 발견합니다.
 
권 백:(... 강서하의 손목에 있던 푸르스름한 빛을 기억한다.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까, 책장을 몇 장 더 넘겨보나.)
 
책장을 더 넘겨봐도 이 이상 눈에 들어오는 정보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책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권 백:(책을 덮고 마지막 책장 앞에 선다. 설마 여기에도 찾는 게 없을까, 조바심을 앞두고 천천히 책장을 살폈다.)
 
700번대 책들로, 다양한 언어에 관한 책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권 백, 자료조사 판정
 
권 백:
자료조사
기준치: 60/30/12
굴림: 92
판정결과: 실패
 
□□□, □□□.. □□..?
 
백의 머릿속에서 또다시 기억이 희미해져 갑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는 구겨진 수첩을 다시 눈에 담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료 조사 판정
 
권 백:
자료조사
기준치: 60/30/12
굴림: 84
판정결과: 실패
 
권 백, 행운 판정
 
권 백:
기준치: 50/25/10
굴림: 47
판정결과: 보통 성공
 
백은 다양한 책 중 ‘언어의 기원’이라는 책을 발견합니다.
 
권 백:이름... (발견한 책의 내용을 읽고는 중얼거린다. 이름, 네 이름을 절대로는 잊어서 안될 이유가 여기 쓰여 있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네가 남긴 쪽지와 관련된 것들은 없는 건가, 다시 잃어버린 길에 책을 덮어 넣고는 그 자릴 떠나지 못한 채 서있었다.)
 
잠시 자리에 서있던 백의 눈에 바로 옆에 있는 책장이 들어옵니다.
 
800번대, [문학] 책장이네요.
 
권 백:(800번대, 분명 처음으로 시작하는 숫자와 번호대가 일치했다. 약간의 기대에 찬 마음으로 행동이 앞선다. 840.01ㅇ...)
 
쪽지에 적힌 창구 번호, 840.01이12꽃.
 
그것은 <꽃갈피>란 제목의 얇은 영문 시집이었습니다.
 
꽃으로 책갈피를 만드는 방법과 짧은 시들이 실려있습니다.
 
수분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꽃을 여러 번 말려야 한다고 하네요.
 
우리의 여름을 닮았습니다.
 
수없이 반복한 탓에, 심장에 꽂을 수 있을 정도로 얇게 마른 우리의 NN번째 여름.
 
책에는 쪽지 한 장이 끼워져 있습니다.
 
권 백:... (직감적으로 이것이 제가 찾는 것임을 깨닫는다. 쪽지를 펼치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
 
선배.
 
권 백 선배.
 
..형.
 
백이 형.
 
 
선배, 저는 선배가 저를 기억해 주길 바라요.
 
하지만…
 
이 세계는 아주 평화로워요.
 
저희가 원래 살던 세계와 아주 유사하고, 저희를 위해 존재하는 듯 해요.
 
마치 저희가, 아니. 선배가 그 자리에 들어가면 되는 것처럼.
 
 
선배도 알잖아요.
 
저흰 너무 많은 여름을 건너왔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존재하긴 할까요?
 
원래 세계를 찾는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만약 선배가 저를 잊고 이 세계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최선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에요.
 
-
 
그 아래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 □□□, □□□…
 
그래요, 강서하.
 
외부세계와 가장 강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 거짓된 세계를 부술 수 있는 한 단어.
 
그러나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거짓된 세계라고 하여도, 한 사람만이 사라진 이곳은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굳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하나요?
 
우린 다시 우주 미아가 되고 말 텐데, 기약 없이 차원의 관문을 다시 넘나들어야 할까요?
 
권 백, 당신에게 강서하는 그럴 가치가, 의미가 있는 사람인가요?
 
권 백:(하여간, 장황하게 설명해주고서 마지막에 덧붙이는 생각이 참으로 옹졸하다. 사실 너라는 존재가 내게 있어 얼마나 크고 특별한 존재인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목숨과 맞바꾸어도 좋을 정도인가? 질문해보아도 잘 모르겠다. 다만 꺾이지 않을 것은 존재했다. 너를 좋아하는 날 잃어버린다는 게 죽기만큼 싫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네가 알려준 걸 잊어버리기 싫다는 것.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내 안의 네 존재에 대한 갈망은 커져가기만 한다. 때문에 무의식 중에 네 이름을 읊조렸다.) ...강서하, (라고.)
(다시 한 번 만나서, 내가 지금을 기억하지 못한다해도. 나는 네가 보고싶었다.)
 
그렇다면 그 이름을 불러요.
 
당신이 갈망하는만큼, 크게.
 
거짓된 여름을 부숴요.
 
남을 기억하고, 형상화할 수 있는 최고의 단어를.
 
강서하를 오롯이 기억하는 당신의 입으로.
 
권 백:강서하, (이 세계가 널 기억할 수 있게, 내 세계에 네가 기억될 수 있게 너를 다시 만나러 갈게. 그 이름을 입에 담는 목소리에는 미세한 진동조차 끼지 않았다.)
 
♬ Pon
 
 
깜빡.
 
당신이 서하의 이름을 부르자, 모든 기억이 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세계의 소리가 멈춥니다.
 
맴맴 울던 매미의 소리, 복도에서 재잘재잘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는 소리까지.
 
시간이 멈춘 듯 이곳은 고요해집니다.
 
기이한 침묵.
 
충분히 겁먹을 만한 상황인데도, 되레 익숙하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권 백, 관찰 판정
 
권 백: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71
판정결과: 실패
 
깜빡이던 형광등이 꺼지고 맙니다.
 
낮인데도 이렇게 어두울 필요가 있을까요?
 
창밖으론 하늘, 땅이랄 것도 없이 검은 우주가 펼쳐져 있습니다.
 
어지러울 정도로 새까만 밤과 반짝이는 은하수, 촘촘히 박힌 별들.
 
건물도 도로도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짙고, 또 짙은 밤하늘이 전부입니다.
 
권 백, SAN 체크
 
권 백:
SAN Roll
기준치: 62/31/12
굴림: 6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치 감소 없음.
 
당신은 깨닫게 됩니다.
 
이 거짓된 세계가 부서지고 있다는 것을요.
 
모두가 사라지고, 오로지 권 백만이 이곳에 남아있습니다.
 
아니, 혼자가 아니라…
 
강서하:선배!
 
운동장이었던 그 너른 공간 한가운데, 우주 위로 서하가 동동 떠 있습니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의, 중력을 무시한 채 흩날리는 서하의 머리카락.
 
마치 그림의 한 폭 같습니다.
 
물론 감상이 이어지기도 전, 그는 당신을 향해 무어라 소리치네요.
 
권 백, 듣기 판정
 
권 백: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22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서하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장 밖으로 나와요! 학교가 무너지고 있어요!’
 
쿠궁,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별가루들이 흩날립니다.
 
어라?
 
그러나 당황하던 것도 찰나.
 
정신을 차리면 100번, 600번, 800번.
 
책장들이 모두 별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어요.
 
심지어… 도서실 전체가, 학교 전체가.
 
당연하죠, 이 세계를 부수는 단어는 당신이 읊었잖아요?
 
주변을 둘러보면 마땅한 탈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대로 잔해 속에 깔리는 건 아닌지….
 
다행히도 창문이 보이네요.
 
아니, 이게 다행인가요?
 
지금이 당신이 있는 층은 1, 2, 3…
 
떠올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어요.
 
강서하:제가 받아줄게요, 뛰어내려요!
 
부서지는 학교, 창문 아래의 서하가 소리칩니다.
 
말이 쉽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요.
 
시간이 없습니다.
 
창틀을 딛고, 유일하게 부서지는 세계 속 당신을 바라보는 이에게 뛰어내려요, 권 백.
 
응원하듯 거센 바람이 당신의 등 뒤에서부터 불어옵니다.
 
권 백:(이판사판 아닌가, 창틀 위를 딛은 발에 힘껏 힘을 주었다. 너를 향해 도약했다.)
 
창턱을 밟고 아래로, 다시 아래로.
 
별가루가 흩어지매 까만 우주는 눈이 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이어질 추락에 눈을 질끈 감아도, 당신은 아주 천천히.
 
중력을 무시하고 아주 천천히.
 
바람 따라 나는 민들레 씨처럼 느릿하게 떨어집니다.
 
와락, 그런 당신을 서하는 쉽게 그러안아 잡습니다.
 
여전히 흐릿하지만, 그 얼굴의 이목구비는 점점 선명해지고 있어요.
 
나풀거리는 머리카락 탓에 꼭 물에 빠진 것만 같습니다.
 
이윽고 외부 세계로 나가기 위해, 외부 세계와 가장 강하게 연결된 서하가 묻습니다.
 
강서하:..제 이름, 기억나요?
 
권 백:당연하지, 그걸 또 말이라고 하냐, 강서하. (웃었다.)
 
백이 답을 하자, 서하의 얼굴이 되돌아옵니다.
 
강서하:그럼 저희가 어떤 관계였는지도요?
 
권 백:... 사귀자는 말은 안했거든?
 
백이 답을 하자, 반짝.
 
둘의 손목에 새겨진 주문진에 빛이 들어옵니다.
 
강서하:그, 그냥 선후배 사이라고 말해줘도 된다구요-.. (하여간에,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 데에는 도가 텄어. 쑥스러운 낯을 잠시 옆으로 돌렸다가 애써 태연히 굴며 다시 너를 본다.) ..이것도 얘기했는진 모르겠는데.. 저희가 처음 싸운 장소는요?
 
이번 물음은 물기 어린 웃음기가 가득합니다.
 
권 백:하, 지금 그게 여기서 왜 나오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 제법 일상스러웠다.) 하여간... 눈치만 없어가지곤... (중얼중얼)
 
강서하:... 그러면, ... (힐긋, 널 올려다보다가) 저희가, 첫, 처, 첫키스.. (우물쭈물) ..한 장소..?
 
권 백:... (가만 보다가 네 손목을 잡았다.) ... 멍청아, (그런 게 지금 왜 중요해. 귓가에만 들리는 소리가 흐려진다. 꽃이 낙화하는 속도만큼이나 가까워지는 거리 탓에, 조심스럽게 맞물린 입술에 제 말에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둘의 거리가 좁혀져 사라지는 순간, 모든 별가루가 허공에 둥둥 뜬 채로 멈춥니다.
 
강서하:... (가까워진 널 보고 눈을 크게 뜨기도 잠시, 곧 차분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기를 한참,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며 선명하고도 불투명하던 눈으로 너를 시야에 품는다.) ...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 집으로 돌아갈 거죠?
 
권 백: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야지. (물론, 너를 포함해서 한 말임이 분명했다.)
 
답을 들은 서하가 환히 웃더니 당신의 두 손을 잡습니다.
 
피부 위로 새겨진 별자리와 같은 무늬가, 애초에 하나였던 것처럼.
 
둘의 팔을 타고 이어져 반짝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푸른 빛이 스칩니다.
 
어디선가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고, 중력이 배로 느껴지는 기분에 속이 울렁거립니다.
 
하지만, 이건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일이었잖아요?
 
부서져 가는 세계, 거짓된 세계, 꾸며진 여름.
 
우린 그것들을 두고 차원의 관문을 넘을 거예요.
 
어쩌면 다시 우주 미아가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가 그 어느 때보다 환히 웃습니다.
 
마주 잡은 손이 웅웅, 진동하며 가볍게 떨립니다.
 
이번에는 어쩐지 감이 좋아요.
 
여름을 말려 심장에 꽂는 법.
 
수없이 반복한, 수없이 넘은 이 여름을.
 
강서하:그림
 
이젠 모두 훌훌 털어버릴 차례입니다.
 
백이 마지막으로 답하자, 강한 빛이 주문진에서 쏟아집니다.
 
우린 차원을 넘기 전, 집으로 돌아가길 빌며 속삭이곤 했죠.
 
이렇게, 우주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보며, 지금처럼.
 
하나,
 
둘,
 
셋.
 
 
깜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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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 시나리오
 
「여름을 말려 심장에 꽂는 법」
 
kpc. 강서하
 
pc. 권 백
 
END 1. 집으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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